사도 조라가 마지막 황제를 베어 폭정을 멈춘 지 92년 후, 구 제국력 658년에 신들의 전쟁이 일어났다. 신들은 서로를 죽이려 권능을 썼고, 사도들은 서로를 죽이려 두렵고 놀라운 성물들을 마구 만들어냈다. 대부분은 유실되었으나, 진홍추적탄이라는 가공할 물건만은 아직도 그 제조법이 전해진다. 그 전쟁을 끝낸 것은, 역사의 많은 사건이 그렇듯 외부의 위협이었다. 사도들이 서로 싸우느라 약해진 틈을 타 다르의 불신자들이 군세를 일으켜 동부를 삼키려 했고, 뒤늦게 힘을 합친 동부의 사도들이 힘겹게 그것을 막아냈다. 남은 힘이 없어 허무하게 종전이 선언되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전쟁은 다르에서 시작해 다르에서 끝난 것으로 보아도 좋으리라 — 한 파냐인 사학자가 그렇게 적었다. 훗날 이 매끈한 역사가 얼마나 큰 자기기만 위에 쓰였는지를,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퀀스
평소와 달리 다급한 얼굴로, 정보관 새벽빛 흐르는 어둠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사도에게서 직접 내려온 급한 임무였다. 너른들 주변 유적을 탐사하다 고립된 연금술사 에테르 ‘시퀀스’ 마그누스를 구출하라는 것. 워낙 시급하여 이번만은 특수병 인원 제한이 없었고, 본진의 방어는 사도가 맡기로 했다. 브리핑을 마치고 15분 안에 출발하되, 반드시 자비사 라하자르를 데려가라 했다. 그가 ‘의식’을 치를 것이라 했으나, 피어는 언제나처럼 자세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부상을 털고 일어난 라하자르는 저질 체력으로 헐떡이며 뒤늦게 따라붙었다. “피어께서 저를 이 임무에 투입하라 하셨다고요. 너무하군요. 같은 다르인끼리 말입니다. 하하!” 산적 여왕 팔카가 언데드의 진격을 저지해준 덕에, 일행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거대한 동물의 두개골이 걸린 유적 입구, 까마귀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반쪽 얼굴이 부패한 사내가 보였다. 시퀀스였다. 구출은 했으나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유적을 탐사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고 “크하하” 웃던 그가 병사들에게 물었다. “너희 군단의 최종 목적은 뭐지? 하늘화살 요새에 도착해 언데드를 모두 막아냈다 치자. 그다음엔? 어차피 죽잖아? 결국 좀 늦게 죽는 것뿐이잖아? 그런 삶에 의미가 있나? 하하핫.” 그가 이 난간의 유적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잿불의 왕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조라에게는 이름을 알면 그 존재를 소멸시키는 주문이 있으며, 마지막 황제 또한 실은 사도였으나 조라가 그 안의 신까지 죽여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 그의 가설이었다. 닉스의 사도가 타락하자 하늘의 달이 깨어지고, 엘레네사가 타락하자 연금술 전체가 오염되었듯, 사도는 신에게, 신은 세계의 질서에 긴밀히 얽혀 있다 했다. “1%의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네.” 도베르트가 말했고, 붉은 발티야가 눌러 담듯 뒤를 이었다. “난, 잿불의 왕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
난간의 유적
유적은 함정과 고대의 적들로 가득했다. 허리를 노린 칼날 함정이 낡아 완전히 돌지 못한 채 살을 파고들었고, 어느 복도에서는 강렬한 불꽃이 뿜어져 한 병사의 상반신을 소리 낼 틈도 없이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 불길 너머에는 군단병들에게 보급할 성해 한 상자가 있었고, 은빛 사붓한 바람과 흙빛 갈기는 폭풍은 함정에 거듭 뛰어드는 무모한 도전 끝에 그것을 손에 넣었다. 독자루가 터지고 독주둥이가 독을 뱉는 통에, 라하자르는 제 몸에 고통을 옮겨받으며 다친 폭풍을 치유했다. 신기해하며 순수하게 물어오는 폭풍 앞에서, 자비사는 통증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끝내 웃는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유적의 심장부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마법으로 타오르는 횃불이 넘어져서도 빛을 냈고, 금속과 돌로 부서진 잔해의 날카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앙의 원형 제단에는 마모된 타일 위로 거대한 금색 문양이 남아 있었다. 시퀀스는 혀를 찼다. “고대 문자 같은 게 아니라면 나는 소용이 없어. 종교학자를 데려와야겠군. 젠장, 시간이 없어!” 그때 라하자르가 손뼉을 딱 치며 앞으로 나섰다. “아하. 이래서 제가 필요했군요. 과연, 이것이 사도의 예언이군요.” 이곳은 제먀의 푸른 피부 대여신의 권능이 깃든 자리로, 기도와 의식을 통해 기억과 지식을 이어받을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다만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비사는 서쪽 난간 앞에 무릎 꿇고 눈을 감았다.
이름 없는 신의 사도

스무 해도 스무 분도 아닌 이십 분쯤이 흐른 뒤, 라하자르가 문득 일어섰다. 그러고는 엉뚱하게 물었다. “여러분, 가장 숭고한 형태의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베르트가 망설임 없이 “가족이네” 하고 답했다. 라하자르는 웃으며 제 생각을 이었다. “가장 숭고한 형태의 사랑은,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설명이라며, 그는 제 고향 다르의 이야기를 풀었다. 다르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이름조차 없는 이름 없는 신을, 섬기지 않는 방식으로 섬기고 맹세하지 않는 방식으로 맹세한 사람들이었다고. 신앙이 절실했던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다르를 탈출하여 아스리카의 자비사가 되었으나, 그날 이후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했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이름 없는 신은 역사상 단 한 명의 사도도 내려보내지 않았다 —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그러했다. 라하자르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다르의 이름 없는 신도 사도를 내려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사도가 바로, 훗날 잿불의 왕이 되는 열두 살의 소년, 세히사 셀리만입니다.” 그 이름을 말하자마자 라하자르의 몸에 끔찍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입에서부터 목과 얼굴이 급격히 부패해갔고, 죽음이 그의 살결을 시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아하, 하하하! 커헉. 이거, 보세요. 결론부터 말할 수 없는 이야기죠?” 은빛 사붓한 바람이 고급 성해를 아낌없이 쏟아붓고, 발티야가 그 이름을 부르며 붙들었다. “안 돼, 또 이렇게 누군가를 잃을 수는….” 다행히 부패는 그쳤다. 시퀀스가 담담히 말했다. “고생했네, 자비사 청년. 잿불왕의 이름을 알아냈으니, 우리는 유일한 공격 방법을 얻은 것이야.”
다시 불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군단의 야영지가 습격당하고 있었다. 특수병이 지키던 부대는 그럭저럭 대치했으나, 특수병 없는 부대는 숙련병과 신병들끼리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 혼전 속에서 별독사대의 신병 테오닌 콜라차이나가 스러졌다. 로젤의 죽음에 무너졌던 그 신병을, 이번엔 아무도 붙들지 못했다. 테오닌을 끝까지 챙겨왔던 보라 키리시가 오래도록 슬퍼했고, 그를 추모하는 짧은 예가 스산한 밤바람 속에 올랐다. 언데드에게 둘러싸인 피어는 이번만은 직접 나섰다. 가시 돋친 식물이 칼날처럼 솟아 언데드를 꿰뚫었고, 터지려는 독자루를 거대한 식물이 감싸 삼켰으며, 어디선가 나타난 곰 한 마리가 남은 썩은것을 발톱으로 찢었다. 목책 위에 웅크린 글리노어도 라이플을 겨눴다. “포스타니에.” 초록 불꽃이 총열로 빨려들며 탄환이 언데드를 꿰뚫었다.
싸움이 잦아들 무렵, 북서쪽 높은 곳에서 태엽을 감는 드르륵 소리가 났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고요하고 불길한 째깍 소리와 함께 군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엽 자객 루고스, 까마귀 부관이었다. 눈치챈 이가 있자 그는 까마귀 수화로 짧은 신호 하나를 남기고 높이 뛰어 사라졌다. 그 뜻은 ‘기대’였다.
그날 늦은 저녁, 굳은 표정의 글리노어가 주먹을 쥔 채 사도의 텐트로 걸어왔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이모의 죽음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마침내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터였다. “내가 찾아올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었겠지.” 그러나 뜻밖에도 피어는 그가 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글리노어는 말을 끊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 그는 피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를 사도로 만들어줘.” 피어의 눈이 잠시 놀라움에 물들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쪽 호반의 굳게 닫힌 성문과, 그 앞에서 기다리는 낯선 거래 하나가 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