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사 어딘가에는, 사도가 되기 전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받았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앞을 내다보는 전략의 슈레야와, 기적의 연금술을 다루던 오르의 대기술사제 엘레네사. 빛나는 영광의 슈레야조차도 엘레네사가 단 한 번 돌아보게 만들기 위하여 무예 경기에서 서른일곱 명의 기사를 물리쳐야 했다고 한다. 슈레야가 엘레네사의 마음을 열고 수없는 시와 노래의 소재가 되는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사도가 되었고 흑색탄의 대량생산이라는 성취를 인류에게 안겼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인류가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엘레네사는 끝내 타락하여 왜곡자가 되었다. 외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되 연금술 전체가 그와 함께 오염되었고, 흑색탄을 신나게 찍어내던 이들은 모두 죽어 나갔다. 그 뒤로 연금술은 쓸 때마다 목숨을 거는 저주받은 기술이 되었다. 인류의 두 빛이 남긴 것은, 이제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불길한 재앙이었다.
아드리미르의 유언
해걸음 야영지 주변의 주둔지. 비넷을 비롯한 몇몇 군단병이 피어의 텐트를 찾았다. 닥터의 연구실에서 마지막을 맞은 아드리미르가, 아카라 피어스에게 전해달라며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텐트 안에는 이미 방금 따른 듯 김이 희미하게 오르는 잎차가 찾아온 사람의 수만큼 놓여 있었다. 피어는 그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 앉아주시겠습니까? 이것은 짧지 않은 이야기가 됩니다.”
“세레나 레이하트. 그녀는 우리 용병단의 조력자였습니다.” 피어는 담담히 이야기를 풀었다. “봄처럼 친절하고, 가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17년 전 그녀는 글리노어의 어머니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아카라 피어스는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세레나는 죽었다. 은화 몇 닢을 받고 한밤중에 몰래 요새의 문을 연 아드리미르 때문이었다. 얼마 전 군단병들이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그 날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피어는 잔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세레나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비넷이 어떻게, 하고 소리치며 일어섰다 다시 앉았다. 그때에도 그 미래를 받아들였느냐 묻자 피어는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라고만 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글리노어를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스월은 함락되었을 것이며, 이모 세런과 글리노어는 도망치다 모두 죽었을 운명이었다고 했다. “나에게 미래는 가능성이 아니라, 눈 앞의 현실입니다.” 세레나가 그에게 무엇이었느냐는 물음에는, 아카라와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고만 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팔카의 산채
이번 임무는 해걸음 야영지의 리더 차가의 의뢰였다. 서쪽 산맥에 산채를 튼 자칭 산적 여왕 팔카가 동서의 길목을 틀어쥐고 사람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팔카를 죽여 위협을 끝내거나, 설득해 언데드와의 싸움에 끌어들이거나. 브리핑을 맡은 사서관은 마지막으로 피어의 청을 전했다. 이번 임무에 글리노어를 데려가 달라는 것. 글리노어는 의료 텐트에서 부상당한 자비사 라하자르를 돌보고 있었다. 인간과 싸우는 임무라면 더욱 갈 이유가 없다며 처음엔 거절했으나, 지휘관을 맡은 산호빛 거둔 들판이 피어가 그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진중하게 전하자 마음을 돌렸다. “글리노어는 전장에 나가기엔 아직 어린아이라네. 예전의 나라면 분명 반대하겠으나… 지금은, 그가 필요하네.”
일행은 남쪽으로 서쪽 산맥을 올랐다. 마차 길이 끊기는 자리의 오두막에서 산적들이 인질을 처형하려던 참이라, 짧은 전투 끝에 셋을 구했다. 그중 하나가 제먀인 말렉세이 마이코비치였다. 17년 전 붉은 깃발 아카라 피어스의 용병단 병사였던 그는, 세레나가 임신 탓에 단식을 하지 못해 아카라에게 대신 일디르의 사도가 되어달라 부탁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노라 했다. 한 달 뒤 아카라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열 주간 이어질 사도 선정 의식은 2주 만에 까닭 없이 멈췄다. 아카라를 잃고 흩어진 용병단과 무너진 제 인생을 두고 그는 군단을 원망했으나, 신병 페니가 노름 이야기까지 꺼내 능글맞게 구슬리자 결국 군단에 합류했다. 인질 곁의 흰머리 신입 산적을 두고 베일리가 다르인이냐 수군댔지만, 그는 다르인이 아니라 그저 어릴 적부터 머리가 희었을 뿐이었다. 산채로 향하는 길에 식사하던 산적들을 썩은것들이 덮치자 일행이 이들을 구해주었고, 그 대가로 팔카에게 이르는 길을 안내받았다.
왜곡자

산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가로막는 산적도 없었다. 나무 위에 지어진 넓은 집, 책이 빽빽한 서재에서 한 여인이 책을 읽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 옷에 금과 터키석 장식이 화려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다들 팔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나시엘이라고 해. 살아있을 때는 오르의 대기술사제, 엘레네사라고 불렸지.” 지금 너희들은 나를 왜곡자라고 부른다던가, 하고 그녀는 검은 잉크 같은 눈으로 웃었다.
나시엘은 길고 곧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본론만 말했다. 슈레야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다, 너희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안다, 그 외의 용건은 없다. 말하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말하면 질문 하나에 답해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곁에 선 산적이 온몸의 살이 썩어 바닥에 뒹굴었다. 지휘관 들판은 부대 전체를 지키기 위해 슈레야가 진군한 곳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답례로 얻어낸 질문은 왜곡자의 약점이었다. 특정한 용액을 목에 주사하면 나시엘의 능력이 사라지며, 그것이 흑색탄과 연관되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돌한 페니가 말대꾸를 했다가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부패를 뒤집어쓰고 쓰러졌다.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찢어질 듯 외쳤다. “다들 뭐하는거야! 이런 기회를!” 글리노어였다. “포스타니에!!” 초록빛 불꽃이 라이플을 타고 올랐다. 동시에 나시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불길한 기운이 바닥에서 세차게 솟구쳐 눈앞이 온통 하얗게 물드는 순간, 글리노어의 탄환은 나시엘의 뺨을 스쳐 지나갔고, 글리노어는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나시엘이 이를 드러내며 분노했다. “용건은 하나라고 했지! 슈레야가 어디로 갔냐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마! 슈레야의 시간은 짧다고!!” 쓰러지는 글리노어를 대신해 신병 아디샤가 몸을 던져 그 일격을 받아냈다. 발티야는 물러나는 왜곡자의 등 뒤로, 언젠가 반드시 군단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겠노라 낮게 고했다.
그리고 새벽

동쪽 방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심한 왜곡증에 온몸이 썩어 들어가며 뒹구는 팔카였다. 의무병 발티야가 그녀를 치료했다. 팔카는 1년 전 홀로 찾아온 나시엘이 손짓 한 번으로 부하 절반을 죽였고, 남은 이들을 지키려 명령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바쳤노라 털어놓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 슈레야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유로 나시엘에게 부패당한 채 버려졌다고. “뭐, 괜찮아.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했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수 있을걸. 두 번째니까 말이지.” 이윽고 살아남은 부하들이 팔카님, 하고 뛰어들자 그녀는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그들을 힘겹게 끌어안았다.
군단은 팔카를 죽여 물자를 취하는 대신 동맹을 택했다. 산적질을 그만두고 언데드와 싸우는 삶을 권하는 들판의 말에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이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자네도 자네만의 멋진 들판을 만들길 응원하겠네.” 트레버도 한마디를 보탰다. “너의 끈질긴 삶이 헛되지 않게 다른 인간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주면 좋겠다.” 무모한 공격 끝에 넋을 놓고 주저앉은 글리노어에게도, 트레버는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글리노어… 당장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겠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함께 갔던 헤이즈가 피어에게 감정을 터뜨렸다. 글리노어가 죽을 위기에 처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를 임무에 보낸 것을 향한 원망이었다. 그 노여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헤이즈는 끝내 뜻을 꺾지 않았다. 피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새벽, 나무 아래 홀로 남은 피어는 동이 트는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시를 삼키듯 고통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레나. 마지막 순간까지 널 용서하지 않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