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구름”

“깃발이 방 깊은 곳에서 빛나고 있어요!”

구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마시는 광인이었다. 그것으로 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몇몇 기록에 따르면 정말로 그리했다고 한다. 구 제국력 566년, 사도 조라가 사도 오이싱그라와 함께 그 황제를 베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황제가 나오지 않았고, 제국은 갈라졌다. 그 참상 앞에서 조라는 깨달았다 한다 — 신의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자는 위험하며, 그것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조라는 황제를 잃은 군단마저 멸하려 했으나, 친우 사도 오이싱그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오이싱그라가 어찌하여 군단을 구했는지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이 한 제먀인 사학자가 남긴 제국의 기록이다. 군단이 지금도 용병단에 가까운 처지로 떠도는 것은, 그날 지켜야 할 황제를 잃은 탓이었다.

붉은 깃발

너른들 근처에 진을 친 지 다시 일주일, 특수병들이 앞으로의 임무를 두고 잡담을 나누는 자리에 귀신올빼미대의 숙련병 비넷이 다가왔다. 지난 임무에서 들은 유언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며칠을 더 알아보았다는 것이었다. 신중하던 예전과 달리 빈 나무통 위에 털썩 앉는 그 모습부터가, 큰 싸움을 겪고 달라진 병사의 것이었다. “아카라 피어스라는 자는 17년 전 분명히 여기 너른들에 있었습니다. 2년쯤 머물렀지요.” 아카라는 이곳에 주둔하던 용병단의 부대장이었고, 검술이 확실했다. “먼지 자욱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적과 싸우는 아카라는 종종 붉은 깃발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부대원들은 ‘붉은 깃발을 따라가면 살 수 있어’ 같은 말을 하곤 했다는군요.” 평소엔 말수가 적고 진지하며 술에 약했고, 작은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했으나 다치게 할까 두려워 함께 놀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런 아카라가 17년 전 어느 날, 말도 서신도 없이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적도 없고 검술도 확실했던 그가 그렇게 사라질 수는 없었기에 소문만 무성했다고 비넷은 전했다. 아카라를 잘 알던 한 피난민은 군단에서 왔다는 말에 불같이 화를 내며, 군단이 아카라를 빼앗아갔다는 말을 남기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했다. 이름은 말렉세이 마이코비치, 제먀인이었다. 비넷은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덧붙였다. 글리노어가 열일곱, 아카라가 사라진 것도 17년 전. 피어는 글리노어를 ‘세레나 레이하트의 딸’이라 했으나 정작 세레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세레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이 아카라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 아무도, 그 붉은 깃발이 곧 자신들의 사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탄타루스의 깃발

지하 발굴장 어둠 속의 탄타루스의 깃발
지하 발굴장 어둠 속의 탄타루스의 깃발

이번엔 사령관이 직접 브리핑에 나섰다. 군단이 처음 세워졌을 때 황제에게 하사받은 상징, 탄타루스의 깃발이 282년 전 조라의 추격 속에 너른들 어딘가에서 사라졌다 했다. 최근 왜곡자가 너른들 남동쪽 산속에 발굴 현장을 파고 까마귀들을 부려 무언가를 캐내고 있으니, 언데드가 더 모여들기 전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목표는 발굴장을 급습해 성물을 회수하는 것. 장교 도베르트와 저격수 트레버, 그리고 별독사대의 신병들이 출전했다.

발굴장의 흉물들은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지난 화에 닥터를 쓰러뜨린 덕에, 낡은 흉물들을 손볼 기술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언데드에게 노역을 당하던 두 일꾼, 포레스트와 푸른 춤 철이 보였고, 소란을 틈타 그들은 도망쳤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어둠은 짙어졌다. 깃발을 지키는 것은 눈이 꿰매인 독자루들과, 깃발 앞에 홀로 눈을 뜬 채 배치된 거대한 독자루였다. 그것이 고개를 돌려 유리엘라 알리코브나를 바라보는 순간 폭발했고, 튀어오른 산성 용액에 데이면서도 신병은 끝내 깃발을 사수했다. 첫 임무에서 마지막 힘까지 짜내는 신병의 모습이었다. 유리엘라의 헌신은 그뿐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등불을 켜고, 요리로 지친 장교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흑색탄을 받아 든 도베르트는 한 손으로 쏜 총알로 흉물의 숨통을 끊었다.

싸움은 신병의 광기와 슬픔으로도 채워졌다. 광신도 멜로디는 “삿된 것들이 다가와요!” 외치며 라이플을 들었고, 실패에도 “이것 또한 신의 뜻!” 하며 해맑게 웃었다. 반면 신병 로젤은 그 지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료의 주검 앞에 테오닌 콜라차이나가 패닉에 빠져 라이플을 아무데나 난사하자, 도베르트가 낮게 눌러 말했다. “죽어도 되는 자리에서 죽으면 된다.” 그것은 장교의 냉정이면서,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격려이기도 했다. 무뚝뚝하나 따뜻한 보라 키리시는 패닉에 빠진 테오닌의 등을 끝까지 다독였다. 마침내 회수한 탄타루스의 깃발은, 검은 바탕에 은빛 문양이 수놓여 바람 없이도 홀로 휘날리며,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앞에 서면 강대했던 탄타루스 황제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글리노어와 귀신올빼미대의 원군이 이미 언데드를 정리해둔 뒤였다.

서쪽에서 온 사도

보라색 구름을 이끌고 달려온 사도 슈레야
보라색 구름을 이끌고 달려온 사도 슈레야

진군 명령이 떨어진 직후, 피어가 사령관 곁으로 말을 몰았다. “여러분, 잠시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와 만날 것입니다.” 서쪽 하늘로 보라색 구름이 모여들더니, 그 아래 대지에서 열 명 남짓한 부대가 군단을 향해 곧장 말을 달려왔다. 선두에는 강렬한 보라색 빛을 뿜는, 긴 금발을 땋은 갑주의 여인이 있었다. 병사들이 창과 라이플을 겨눴으나 피어는 길을 내달라 청했고, 여인은 부딪힐 듯한 거리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다가 급히 말을 세웠다. 뒤따른 흙먼지가 병사들을 덮치는 와중에도 피어에게는 티끌 하나 닿지 않았다. 사도 슈레야였다. 그의 목소리는 입이 아니라 병사들 각자의 귓가에서 울렸다.

“나는 군단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간다.” “알고 있습니다.” “왜곡자는 나를 따라온다. 그러면 이것도 알고 있겠지.” 피어가 그렇다 답하자 슈레야는 몇 가지를 물었다. 왜곡자가 한 달 안에 죽는가, 자신이 한 달 안에 죽는가 — 피어는 “말할 수 없습니다”로만 답했다. 슈레야는 불만스레 허리에 손을 얹더니, 답할 수 있는 것부터 물었다. 여긴 어디지, 네 이름은, 사도가 되기 전엔. “너른들.” “피어.” 그리고 입가의 미소가 잠깐 사라졌다가, 그는 대답했다. “아카라 피어스.” 무슨 신의 사도냐는 물음엔 “알지 못합니다”, 잿불의 왕의 이름엔 곤란한 표정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곤란함을 본 슈레야가 만족한 듯 씩 웃었다. 뒤늦게 말에서 내린 부대원 둘, 황금빛 타오르는 눈보라와 스베레나는 군단의 분파임을 밝히며 어느 쪽이 진짜 계승자인지를 두고 티격태격했다. 떠나려는 슈레야에게 피어가 발밑에서 피워낸 보라색 라일락을 건넸다. “라일락은 나무에서 피는 꽃일텐데. …피워낼 수 있는 건 꽃 뿐인가?” 피어는 빙긋 웃을 뿐 답하지 않았고, 슈레야는 그 꽃을 제 말의 머리에 꽂았다. “그럼, 하늘화살 성채에서.” “네, 부디.”

몰랐습니다

말을 몰아 북쪽으로 사라지는 슈레야를 얼이 빠진 채 바라보던 파르라니 흔들리는 샛별이, 아랫턱을 떨며 피어에게 물었다. 달려오던 사도가 타락자일 수도 있었는데, 공격하지 않을 것을 어찌 아셨느냐고. 예언의 힘이냐고. 피어는 신병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 계절엔 맡을 수 없는 꽃향기가 그를 감쌌다. “예언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랍니다.”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예측하신 거냐고 샛별이 거듭 묻자, 피어는 고개를 돌려 구름이 걷혀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아닙니다. 저는,” 바람에 꽃이 날리는 소리처럼, 그가 말했다. “몰랐습니다.”

세계의 정체를 파헤친다는 예언자조차 알지 못한 채 믿었던 그 순간을 품고, 군단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남쪽 해걸음 야영지로,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는 자칭 산적 여왕과 왜곡자의 그림자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