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불길”

“까마귀 흉내를 내려면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할 겁니다.”

불타는 칼스부르크에 잠입한 척후병
불타는 칼스부르크에 잠입한 척후병

다르인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신이 사도를 내려보내 그 힘으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꾸는 이 세계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눈앞의 꽃을 보고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 아이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불신자들의 도시 다르는 신들의 분노를 샀고, 그 힘에 멸망하여 이제는 분노로 가득 찬 유령들만이 잿더미 황무지를 배회하는 땅이 되었다. 그럼에도 다르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다르에서 태어난 자는 그 땅을 떠나면 몇 해 뒤 피를 쏟고, 돌아가지 않으면 끝내 죽는 저주를 받은 까닭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흰 머리의 다르인들 — 한 파냐인 병사의 수기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신을 믿지 않은 대가가 그토록 크다는 것만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검은 피

숙영지에 쓰러진 피어의 코와 입에서는 피처럼 보이지도 않을 만큼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병들이 응급조치를 외치며 달려들었고, 특수병들이 뒤따랐다. 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주로 인한 피해였다. 손을 쓰자 피는 멎었고, 이윽고 피어가 허공을 향해 눈을 떴다. “당신의 뜻은 알겠습니다, 글리노어.”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제 목소리로 돌아왔을 때, 천막 안에는 꽃이 피어나는 듯한 향이 감돌았다.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였군요.” 그가 담담히 말했다. “저는 다르인입니다. 다르로 돌아가지 않으면, 몇 주 안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된 지금까지도 다르의 저주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자신조차 몰랐던 것이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군단에는 사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글리노어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사도가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저는 읽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 나무 울타리에 기대선 글리노어가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사이 피어의 기억 일부가 그에게 흘러들었다고 했다.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피어가 하고 싶어하던 얘기는 알았어.” 글리노어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수백 명을 죽일 살인마가 될 아기가 절벽에서 떨어지려 할 때, 당신들은 그 아기를 구하겠느냐고. “난 구할거야. 돌봐주고, 안아주고, 사랑해주면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내 손으로 죽여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내 눈 앞의 아기를 구할거야.” 그러나 피어에게는 그 아기가 이미 살인마였다. 고정된 미래를 보는 눈에는, 이모의 죄가 이미 저질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피어는 내 이모에게 사형을 내린거야.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글리노어는 말을 맺었다. “설명도 없이. 작별할 시간도 없이. …나는 사도가 되지 않아. 그건 이모에 대한 내 마지막 예의야. 나로서 살고, 나로서 죽을거야.”

병사들은 저마다 다른 말로 그를 붙들려 했다. 은빛 사붓한 바람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고 조용히 권했고, 붉은 발티야는 제가 왜 의무병으로 사는지를 다시금 다지듯 말했다. “이미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뜻을 남은 이가 실천해주는 방법 뿐이다. 끝없이.” 도베르트 다 사니치는 동요 없이 지금 놓인 선택지를 정리해주고는, 언제든 힘들면 찾아오라 일러두었다. 그러나 글리노어의 어금니는 풀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도가 아닌 군단의 특수관계인으로 남기로 했다. 명령에 복종할 의무 없이, 다만 곁에 머무는 신병이었다.

불타는 칼스부르크

일주일 뒤, 지휘관 텐트에 병사들이 모였다. 지도 위 칼스부르크에는 언데드의 영역을 나타내는 붉은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이번 임무는 그 불타는 도시에 홀로 남은 척후 특수병 키예르 경을 구출해오는 것이었다. 왜곡자의 계획을 캐기 위해 스스로 남았던 그가 창고에 숨어 지원을 기다린다는 서신이 도착한 터였다. 이미 건넜던 티게리아 강을 되짚어 건너, 언데드가 점령한 도시에 숨어들어야 하는 길이었다. 특수병 다섯이 함께 움직이던 1화와는 다른 임무임을, 브리핑은 몇 번이고 못 박았다. 지휘를 맡은 은빛 사붓한 바람이 부대를 이끌었다.

강의 다리 위, 은빛 사붓한 바람은 활을 들어 까마귀의 목을 소리 없이 꿰뚫으며 잠입을 열었다. 도시 안에서는 까마귀와 썩은것들이 부대 단위로 움직이고 흉물들이 어슬렁거려, 걸리는 것이 곧 죽음이었다. 척후병은 허름하게나마 까마귀의 흉내를 내며 그 무리 사이를 지났다. 까마귀 흉내를 내려면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 그 한 가지 원칙만이 목숨을 지켰다. 그가 까마귀들과 수화를 주고받자, 놈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함정인지 이중 첩자인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지나, 병사들은 불타는 창고에서 키예르 경을 찾아냈다. “다행히 여기로 대피할 수 있었지.” 조금의 불안도 내비치지 않는 미소로 그가 맞았다. 벽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흉물과 까마귀들이 들이닥쳤고, 짧고 격렬한 싸움 끝에 병사들은 그를 구해냈다.

닥터의 연구실

흰 가면의 악명병 ‘닥터’와의 사투
흰 가면의 악명병 ‘닥터’와의 사투

“닥터의 연구실이 여기서 멀지 않아.” 키예르 경의 그 한마디가 병사들의 귀를 쫑긋 세웠다. 흉물을 찍어내는 악명병의 연구실을 부수면 한동안 놈들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 했다. 재정비하고 다시 오는 편이 낫지 않겠냐던 신중함은, 호기심에 밀려났다. 이곳은 던전이 아니라 잿불이었으나, 병사들은 아직 그것을 몸으로 알지 못했다. 함락된 도시라 방심한 탓인지 경비는 성겼다. 대신 연구실은 그 자체가 지옥이었다. 문 하나를 열자 초록색 독액이 쏟아졌고, 또 다른 방에는 서로 꿰매어진 시체들, 피부 대신 못과 철판을 붙인 흉물의 실패작들이 벌레 소리 속에 쌓여 있었다.

그 시체 더미 속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등이 다른 사람과 척추째 꿰매인 사내, 제 가슴에 다른 머리가 돋아난 사내였다. “동남쪽 방에 아직 사람인 자들이 있어. 구해주면 좋겠군. 이게 정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부탁은 죽음이었다. “유언을 전해줄 수 있는가? 내 이름은 아드리미르 테오비치. 너른들의 아카라 피어스에게. 미안하다. 그 날 문을 연 것은 나였어. …미안하다.” 병사들은 살릴 가망 없는 이들을 조용히 놓아주었다. “아스리카의 자비가 후세에도 함께하길.” 키타 데와의 나직한 조사(弔詞)가 실험실의 악취 위로 흘렀다.

마침내 마주한 닥터는 뼈처럼 흰 가면을 쓴 악명 까마귀, 이 캠페인이 처음 만난 악명병이었다. 독병과 독안개를 광역으로 뿌리며 제 몸만은 면역이었고, 거대한 흉물이 그 곁을 지켰다. 피해 칸이 빼곡히 채워지는 사투였다. 산호빛 거둔 들판이 도끼로 앞을 막아섰고, 은빛 사붓한 바람은 까마귀를 맡으며 신병들을 들판에게 부탁했다. “원장님, 신병들을 부탁드립니다.” 그가 자신을 거둬 키운 옛 고아원의 원장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긴박한 틈에 그는 아껴둔 고급 성해를 들판의 손에 쥐여주었다. “원장님, 이건 보답입니다.” 그러나 대가는 컸다. 귀신올빼미대의 신병 노을빛 일렁이며 흩어지는 꽃내음이, 그리고 스벤이 그 자리에서 스러졌다. 그럼에도 특수병은 하나도 잃지 않았고, 닥터의 흉물 강화 실험을 끝냈으며, 반송장 꼴이나마 키예르 경을 살려서 데려왔다. 정말 전멸하는 줄만 알았던, 캠페인 통틀어 손꼽히게 고된 임무였다.

붉은 깃발의 그림자

한편 도베르트 다 사니치와 바론 트레버는 서부전선과 너른들 사이의 경로를 정찰하는 부임무에 나섰다. 매복한 언데드가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피어의 예언으로 그 위치를 이미 알던 두 사람은 오히려 뒤에서 놈들을 급습해 경로를 확보하고 돌아왔다. 사도가 함께한다는 것은 안전이면서 동시에 위험이라던 글리노어의 이모의 말이, 그렇게 조금씩 이해되어 갔다.

그리고 병사들의 손에는 하나의 이름이 남았다. 아드리미르가 유언을 전해달라던 그 아카라 피어스. 알아보니 그는 17년 전 너른들에 분명히 있었으나,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춘 용병이었다. 어쩌면 군단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그 이름을 품은 채, 군단은 긴장과 두려움이 감도는 상업 마을 너른들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 재앙의 세계에 감춰진 것들의 냄새를, 병사들은 이제 겨우 아주 조금 맡기 시작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