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장작”

“같이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불타버린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도 피어
불타버린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도 피어

구 제국력 848년. 동부 연합군은 끝없이 밀려드는 언데드의 군세에 패배했고, 군단은 티게리아 강을 넘어 동쪽으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전투로 황폐해진 땅과 불타버린 잔해를 지나는 병사들의 걸음은 무거웠다. 서쪽 멀리, 한때 번영했던 알더마크의 수도 칼스부르크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불길하게 물들였고, 그 연기 사이로 언데드가 시체를 파먹는 광경이 이따금 내비쳤다. 수천에 달했던 군단은 이제 수십으로 줄어 있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신의 사자인 사도가 그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군단은 마지막이 될지 모를 한 번의 반격을 위하여, 하늘화살 성채를 향해 걷고 있었다.

퇴각하는 대열 사이로 작전관이 말을 몰아 특수병들에게 다가왔다. 서부전선으로 가기 전, 남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에텐마크 평원 전투의 보급로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임무는 그곳의 곡식 창고를 남김없이 불태우고 농부들을 피난시키는 것이었다. 적의 보급을 끊는 동시에, 언데드가 되기 전에 농부들을 살려 보내려는 두 겹의 뜻이 담긴 명령이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을 위해 군단은 손해배상 증서를 발행하기로 했다. 작전관은 특수병 전원에 더해 귀신올빼미대에서 셋, 곧 파르라니 흔들리는 샛별과 비넷, 노을빛 일렁이며 흩어지는 꽃내음을 딸려 보냈다.

불타버린 나무 아래의 사도

길가의 불타버린 나무 아래, 사도 피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치에는 방금 피어난 듯한 꽃이 자라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별빛이 따스하게 어렸다. 피어가 입을 열자 병사들은 몸속 가득 싱그러운 풀 냄새를 느꼈다. 피어는 특수병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렀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임무와는 별개로, 그는 그들에게 사명을 맡겼다.

“한 아이를 데려와 주세요.”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누군가 ‘포스타니에’라는 말을 할 것이니, 그 말을 한 아이를 데려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피어는 그 아이가 세계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 답했고, 그 이상은 운명이 바뀌기에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떠나려는 이들을 그가 다시 불러 세웠다. 혹 그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막는 사람이 있거든 이것을 주라며, 피어는 소매에서 꽃 장식이 새겨진 작은 보석 케이스를 꺼내 건넸다. “아마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케이스는 열리지 않았다.

보급로의 마을

반나절을 걸어 다다른 그래스월 마을은 멀리서 보기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외곽의 농장에서 병사들은 농부들과 처음 맞닥뜨렸다. 파르라니 흔들리는 샛별이 눈에 띄는 것마다 “언데드다!” 하고 외쳐대며 소란을 일으키는 통에, 도베르트 다 사니치는 그를 구석으로 데려가 따끔하게 나무라야 했다. 농부들을 설득하는 자리에서 도베르트는 손해배상 증서를 내밀며 “여깁니다, 여기.” 하고 글 모르는 농부에게 서명할 자리를 짚어주었고, 바론 트레버는 농장주의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슬쩍 비위를 맞췄다. 문 안쪽에서 기침을 쏟으며 나온 농장주 할아버지 토로스 슈메커는 “포스.. 포스타.. 엣취! 포테이토!” 하고 재채기를 했는데, 그 소리가 얼핏 피어가 일러준 그 말처럼 들려 병사들이 잠시 술렁였다. 물론 그가 데려올 ‘아이’일 리는 없었다.

서부전선으로 향하려는 여행자들이 농부들에게 곡식을 나눠 받으려 실랑이를 벌이자, 병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도베르트는 손익을 따졌다. “저 여행자들이 곡식을 받고 이 마을을 떠나다가 적들의 습격을 받아서 또 다른 언데드들이 되고 갖고 있던 곡식까지 빼앗긴다면, 우리의 임무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을걸세.” 그러나 산호빛 거둔 들판은 생각이 달랐다. “내 생각은 장교님과 좀 다릅디다. 피난민에게 작은 선행을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선행은 또 다른 선행을 낳는 법이지요. 홀홀.” 결국 바론 트레버가 하루치 식량만이라도 챙겨주자며 절충했고, 은빛 사붓한 바람은 여행자들에게 차라리 군단 모병에 자원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곡식 창고를 살피던 은빛 사붓한 바람에게 무언가가 뛰쳐나와 물어뜯었다. 피부가 창백하고 뼈가 드러난, 사람의 형상을 한 썩은것들이었다. 일부는 농부들에게 달려들었다. 짧고 격렬한 싸움 끝에, 바닥에 넘어져 절망에 젖은 농부의 얼굴 앞으로 산호빛 거둔 들판의 넓은 등이 나타났다.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네, 젊은이.” 붉은 발티야는 몸을 던져 사람들을 막아섰고, 그 대가로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 하나 잃지 않고 창고의 언데드를 정리했다.

포스타니에

지붕 위에서 라이플을 겨눈 소녀, 글리노어
지붕 위에서 라이플을 겨눈 소녀, 글리노어

마을 안쪽 2층짜리 농가에는 굳게 닫힌 곡식 창고가 있었다. 농부들이 시들한 얼굴로 정원 일을 하는 가운데, 안에서 여성 하나가 걸어 나왔다. 노렌트 휴스라 자신을 밝힌 그녀는 손해배상 증서를 유심히 뜯어보더니 트집을 잡았다. “이봐요 손해배상 증서… 기한이 없잖아요. 무한이라고?” 이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당신들 사기꾼이죠. 사실은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사람들 아니에요?” 그 말과 함께 사람 형상의 흉물들이 뛰쳐나와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전투가 어지럽게 얽힐 무렵, 지붕 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멈춰!” 갈색 머리의 소녀가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등에 멘 라이플을 꺼내 언데드를 겨눴고, 바람 소리를 뚫고 또렷한 한마디를 뱉었다. “포스타니에.” 소녀의 손이 녹색으로 불타는 듯 보였으나 조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녹색 화염이 총열 안쪽으로 빨려드는가 싶더니, 소녀는 총구를 노렌트에게 돌렸다. “날 속일 수는 없지.” 총성이 울리고, 노렌트의 가슴에서 초록색 불꽃이 튀었다. “이 정도까지 하는 줄은 몰랐군, 그림자 마녀.” 소녀의 이름은 글리노어 레이하트였다. 남은 언데드까지 함께 정리한 뒤 병사들이 군단과 함께 가자 청했으나, 글리노어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모와 함께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신들.. 군단이죠. 이모에게 들었어요. 군단은 사도와 함께하기 때문에 안전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고요.” 그녀는 이모 곁에 남아 숨어 살기를 택했다.

다 타버린 장작

병사들은 글리노어를 따라 그녀의 이모에게로 갔다. 세런 레이하트는 완강했다. “미안하지만 군단과 함께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군단과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굳게 다문 어금니에서 물러설 뜻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병사들은 피어가 건넨 작은 보석 케이스를 내밀었다. 세런은 케이스에서 보석을 꺼내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답군요. 이 정도 보석이라면.. 최소한의 신분 보장은..” 그런데 세런은 이상하리만치 보석을 눈 가까이 대고 한참을 응시했고, 어느 순간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모! 무슨 일이야!” 글리노어가 달려갔을 때 세런은 이미 힘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눈에서는 피가 흘렀다. 몸은 멀쩡했으나 영혼이 철저히 부서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었다.

“죽었다고요? 농담이죠? … 당신들은 뭐야? 군단? 군단이라고?” 글리노어는 이모를 끌어안고 울부짖다 천천히 라이플을 꺼내 들었다. “당신들은 평생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악한 사람들입니다. 농부들의 곡식을 불태우고, 이모를 죽였어요.”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가 방아쇠에 힘을 주며 외쳤다. “포스타니에!” 순수하게 이모를 소개했을 뿐인 소녀였다. 병사들은 사도의 부탁이었기에 어떻게든 그녀를 기절시켜 초소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마을 사람도, 신병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오직 세런 하나만이 쓰러졌다.

숙영지로 돌아온 군단은 아직 서부전선에 이르지 못한 채 조용히 언데드를 경계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글리노어의 이모가 죽는 것을 지켜본 붉은 발티야는 상심에 잠겨, 돌아온 사도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피어는 언제나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고, 쓰러진 글리노어에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눈물을 조용히 흘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글리노어 레이하트. 세레나 레이하트의 딸이여.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피어의 손을 따라 글리노어의 몸에 별빛이 번졌다. 피어에게서 풍기던 꽃 냄새와 별빛의 기운은 점점 옅어지고, 대신 오래 맡지 못한 신선한 흙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그대는 신을 섬기며, 신의 길에 따라, 신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새로운 사도가 되겠습니까?” 긴 침묵 끝에 글리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광이군요.” 피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글리노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절합니다.” 피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놀라움과 수치가 뒤섞인 얼굴로 그는 몇 걸음 물러섰고,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 소매로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았다. “사도님!” 병사들이 놀라 일어섰다. 이윽고 피어의 코와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온몸의 힘이 빠진 듯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병사들은, 피어에게서 다 타버린 장작의 향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