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

“바람”

“제발, 인간끼리 해치는 건 지긋지긋하네.”

가을 산 공터의 계승 의식
가을 산 공터의 계승 의식

호반 서쪽 산맥에 이른 아침이 내렸다. 초록의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을의 붉은 불꽃과 금색 물결이 번지기 시작한 산이었다. 군단병들은 산의 초입부터 정상까지 길목마다 흩어져 산 중턱의 공터를 경계했고, 이따금 그 한가운데로 시선을 던졌다. 공터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으나 제단도 의식용 도구도 없었다. 오직 글리노어 하나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정좌한 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터 가장자리에 선 피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은 침묵에 잠겨 가끔 바람 소리만 들렸다. 피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도 계승의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흐려지는 별빛

피어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글리노어 레이하트. 그대는 신을 섬기며, 신의 길에 따라, 신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도가 되겠습니까?” 주변의 나뭇잎이 춤추듯 흔들리고 공기가 숨을 죽였다. “네.” 글리노어가 무겁게 답했다. 피어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별빛이 몸을 따라 번져나갔으나 — 이내 흐려졌다. 피어는 한 걸음 물러나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손을 얹었다. 별빛은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피어가 단정히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왜 사도가 되기로 결정하셨죠?” 글리노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신이… 더이상 사도가 아니었으면 하니까. 그렇게 사람의 생명을 쉽게 생각하는 당신이, 사도여서는 안돼.”

피어의 입술이 떨렸다.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사도 계승은 신앙심이나 의도와 관계없이 본인이 수락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고, 진심이냐 묻자 글리노어는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 “그래!” 하고 소리쳤다. 다시 손을 얹는 순간, 병사들의 코끝에 언젠가 맡았던 다 타버린 장작의 냄새가 스쳤다. 그리고 또 한 번, 피어는 물러섰다.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내가 마음에 안 든 거야? 내가 부족한거야?” “아닙니다. 의식은 그런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비난도 원망도 없는, 고요하고 잔잔한 슬픔만 담긴 눈으로 그는 글리노어를 잠시 보았다. “…아닙니다.” 몸을 돌려 사령관을 지나치며 그는 짧게 말했다.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군단으로 복귀하십시오.”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검은 피가 비쳤다. 공터 한가운데 홀로 남은 글리노어가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왜… 왜….” 그 실패의 까닭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성벽 너머

군단의 야영지 앞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의자를 놓고 앉은 대즐링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 호반의 굳게 닫힌 성문을 지나기 위한 거래였다. 시 의원 하나를 처리하면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겠다는 상인 길드 스파크의 의뢰. 글리노어가 먼저 나서서 임무에 데려가 달라 청했다. 계승에 실패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때문이었다. “저기, 나는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붉은 발티야가 짧게 답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이상 쓸모 없어지는거다.”

대즐링과 포인트블랭크를 따라, 병사들은 난민들의 텐트촌을 지나 배수로에 숨겨진 문으로 성벽을 넘었다. 전쟁의 상처라곤 보이지 않는 깨끗한 거리였다. “여긴 언데드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나보군.” 글리노어가 중얼거렸다. 스파크의 회장 바흐자릴은 침실 뒤에 감춰진 방에서 사업가다운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시 의회는 찬반 10대 10으로 갈렸고, 그중 여럿이 동쪽 호반을 사실상 지배하는 딜루젼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했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카로지 의원이야.” 군단을 위험한 반란 세력으로 보아 성에 들이지 않으려는 자, 여차하면 저 혼자 살아남으려는 자라 했다. “카로지 의원 하나가 죽어서 수천 명이 살 수 있다면?” 언데드는 성벽을 넘느니 돌아가는 편을 택할 것이며, 그 유명한 엘레네사가 그 정도 계산을 못 할 리 없다는 것이 이 도시의 자신감이었다.

트윈포크

카로지가 자주 나타난다는 식당 트윈포크에서, 병사들은 보좌관 조를 만났다. 무기를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 정장을 입은 채 졸던 카로지 바르시아를 마주했다. 딱딱한 인상과 달리 유쾌한 사람이었고, 평판도 좋았다. 절뚝이는 다리로 한때 알더마크군이었던 그는, 난민을 구하고 싶으나 전부 받으면 서쪽 호반이 무너질 수 있다 했다. 언데드 중에는 인간으로 가장한 자가 있고, 파열자 같은 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실례되는 생각입니다만, 당신들이 파열자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난민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법안에 찬성하겠습니까, 반대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난민에게도 시민과 같은 법적 보호를 주는 법안을 홀로 만들고 있었다.

카로지의 말을 들을수록 병사들의 확신은 뒤집혔다. 이자는 죽여 마땅한 자가 아니라,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저를 죽이러 온 자들에게도, 그는 스파크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이익 집단이라 담담히 경고했다. 문제는 조였다. 카로지와 10년을 함께한 그 보좌관은 이미 스파크에 매수되어 있었고, 최근 고용된 경호원들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도 모른 척 채용한 터였다. 그 경호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저주병과 그림자 마녀였다.

그림자 마녀

식당 2층에 나타난 악명병, 힐트
식당 2층에 나타난 악명병, 힐트

북쪽 방에서 사람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일반인 경호원이 마녀들에게 살해된 것이었다. 경호원 하나가 품에서 검게 썩은 손가락을 꺼내 던졌고, 그것이 닿기도 전에 살이 썩어들었다. “살려줘! 저는 협박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비명에 카로지가 몸을 던져 사람을 감쌌다. 무기를 아래층에 두고 온 병사들은 손에 잡히는 것으로 싸워야 했다. 산호빛 거둔 들판이 변이병에게 달려들자, 발티야가 던진 단검이 바닥에 튕겼고 들판은 그것을 받아채 그대로 내리쳤다. 저격수 트레버와 글리노어는 총도 없이 접전에 몰려 고전했다.

그리고 그림자 마녀들을 검으로 베어버리며, 한 악명병이 나타났다. 힐트, 이 캠페인이 처음 만난 오리지널 악명병이었다. 왼손을 들어 저주로 움직임을 묶고 검을 찔러넣는 그 검술은, 생전 아카라 피어스를 동경해 익힌 것이었다. 파열자의 거짓 인질극에 속아 목숨을 잃은 뒤, 이제는 동료도 윤리도 버리고 파열자의 편에서 싸우는 검사였다. 스치는 일격마다 깊은 상처와 부패를 남기는 사투 끝에, 병사들은 힐트를 쓰러뜨리고 평화를 되찾았다. 발티야와 트레버와 들판은 저마다 왜곡증 한 겹을 안고 돌아왔다. 그리고 카로지는, 죽지 않았다. 스파크의 의뢰는 실패로 끝났으나 병사들은 서쪽 호반 안으로 들어섰고, 무엇보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인간끼리 해치는 것은 지긋지긋하다던 산호빛 거둔 들판의 나직한 말이, 그 선택의 전부였다.

슈레야의 유언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밤, 황금색 갑옷을 두른 이가 말을 타고 야영지로 다가왔다. 황금빛 타오르는 눈보라였다. “초면은 아니군요. 한 가지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가 말에서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기름으로 찬 병들, 바닥에 뼛가루가 가라앉은 성해가 들어 있었다. “여러분에게 이것을 전해달라는 것이, 슈레야 님의 유언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숨을 삼켰다. “슈레야 님은, 나시엘에 의해 전사하셨습니다. 타락자가 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라일락을 건네받고 하늘화살 성채에서 만나자던 사도는, 그렇게 먼저 떠났다. “그리고 우리 분파의 자비사였던 일레나가 새로운 아스리카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앞을 향할 것입니다. 그럼.”

계승은 실패했고, 사도 하나가 스러졌다. 그 실패의 까닭도, 피어의 흐려지는 별빛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군단은 동쪽 호반으로 향했다. 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장 아프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