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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포

초보자의 눈으로 룰을 분해하다

어둠칼 캠페인 Data Exfiltration 시즌3(페스타 · 거머리)과 시즌4(재봉틀 · 야매의사) 두 구간에 걸쳐 에이포가 남긴 후기 16편과 그가 만든 시즌3 이벤트 타임라인을 근거로 읽는다. 인용은 모두 저장소에 미러링된 후기 원문에서 가져왔고, 본인의 말인지 다른 플레이어의 말인지 마스터의 말인지를 인용마다 밝힌다.

시즌3 0화 후기의 자기소개는 여섯 글자로 끝난다. “정진정명한 초보입니다.”

겸양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TRPG가 처음이었고, 음성채팅으로 진행한다는 것도 수락한 뒤에야 알았다. 그런데 그 초보가 1.5화 후기부터 룰 텍스트를 뜯기 시작한다. 하중을 자리수까지 계산하고, 특수능력 후보에 순위를 매기고, 마스터에게 룰 해석을 역제안한다. 이 글은 그 대비에 관한 것인데, 결론은 “초보였는데 잘했다”가 아니라 초보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매번 뜯어봤다는 쪽에 가깝다.

무엇이 새로운지를 정확히 짚는 초보

입문자의 후기는 보통 감상으로 채워진다. 에이포의 첫 후기는 그렇지 않다. 세션이 시작되기도 전 캐릭터 메이킹 단계에서, CRPG 경험자의 눈으로 TRPG의 차이를 정의부터 내려 놓는다.

플레이어가 캐릭터와 분리되어 세계관에 참견해서 비어 있는 세부사항을 같이 채워넣는 경험은 무려 실제 플레이 세션 전인데도 신선했습니다. (…) CRPG에서는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이 제작자가 만들어둔 주어진 변경 룰을 쓰기만 하면 됐었죠. 놀라워라.” — 본인, 시즌3 0화 후기

9화 후기에서는 그 관찰이 설계자의 어법으로 올라간다. 힌트를 일부러 줘도 놓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TRPG의 재미로 꼽으면서, 자기도 놓친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쓴다. “반전이 나왔을 때 더 세게 얻어맞을 수 있게요.” 추리 중인 플레이어가 할 말은 아니다. 내향적이라 합류 자체를 오래 망설였다던 사람이 자기가 앉은 자리의 구조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다.

룰을 지키는 대신 룰과 협상한다

어느 회차를 펴도 조합을 설계하는 대목이 나온다. 시작은 1.5화, 거머리의 파괴 전문가였다.

“거머리 특수능력 파괴 전문가에는 파괴공학이 수반된다고 마스터에게 우겨볼 계획입니다. demolition expert!라고 하면 당연히 파괴공학 할 줄 알고 고오급 폭탄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시스터.S는 (건물들의) 도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폭탄의 위력만 충분하면 … 뭐하러 접전 같은 걸 하죠?” — 본인, 시즌3 1.5화 후기

7화 후기는 특수능력 선택을 손익 계산표로 만든다. 하중 상한 안에서 무엇을 들 수 있는지 따진 뒤 순위를 매긴다.

“칼잡이의 노새(갑옷!)도 후보네요. 하중 3/5/6에서 5/7/8 … 즉, +2. (…) 쓰면서 정리해 보니 1위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2위 “유령진”, 3위 “계산적” or “노새” 정도 되겠네요.” — 본인, 시즌3 7화 후기

더 강한 조합을 찾아내고 스스로 기각하기도 한다. 조직 특능을 조합하면 폭탄에 사실상 유도 기능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아군을 향해 달려올 수 있다는 이유로 접는다. 최적해보다 그것이 테이블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를 먼저 보는 태도다. 그리고 이 협상은 실제로 룰을 바꿔 냈다. 유령 잡는 폭탄은 룰 해석에 걸려 좌절됐지만 그 자리에서 사냥개의 일렉-탄약을 확대한 일렉-폭탄 룰이 만들어졌고, 유탄발사기는 룰 조율까지 끝내고 “꽤 훌륭한 결전병기”가 됐다. 마스터는 이 제작 레시피들을 시즌의 성과로 꼽으며, 어둠칼의 일부인데도 지금까지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적는다.

시즌 총평에 이르면 개별 조합이 아니라 룰 설계 자체를 겨눈다. 건수의 길이가 특수능력의 가치를 바꾼다는 아래 지적은 룰북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긴 건수 시스템(3\~?시간)에 좋은 특능과 짧은 건수 시스템(1\~3시간)에 좋은 특능이 갈리겠더라구요. 대표적으로 계산적, 부업, 분석가 같은 막간활동용 특능이나 스트레스 사용 특능은 막간활동이 자주 돌아올수록 더욱 효과적이겠고” — 본인, 시즌3 캠페인 후기

한 시즌 만에 룰이 상정한 페이스를 역추적한 셈이다. 4화 MVP 사유에도 같은 인상이 적혀 있다.

“이런 노련함을 보면 TRPG를 처음 하시는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죠!” — 오랑시, 시즌3 4화 후기

자기 캐릭터도 분해 대상이었다

같은 손이 자기 PC에도 그대로 들어간다. 시즌3 캠페인 후기의 “THE 비하인드” 절은 설계 회고에 가깝다. 무엇을 넣었고 그것이 합쳐지면 무엇이 되는지를 본인이 먼저 진단한다.

“저 각자의 특징들은 떼어놓고 보면 사람의 조금 특이한 점 혹은 장점이지만,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신대로 그 합성물/결과물인 페스타는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죠. 인간을 초월해버리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점이 부각된다고 할까요.” — 본인, 시즌3 캠페인 후기

노역소 폭동 속에서 갑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 페스타 — 시즌3 8화
노역소 폭동 속에서 갑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 페스타 — 시즌3 8화

가장 값진 것은 캠페인 중반에 설정을 조용히 갈아 끼웠다는 고백이다. 진행 중이라 공개된 설정은 못 바꾸니 안 보이는 곳에 한 줄을 더했다고 한다.

“간단하게 ‘생애 처음으로 사람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점점 황혼전달자와의 유대감이 생겨서 자신의 생명 이외의 일에는 팀을 우선하게 됨(하지만 이 점을 이용당할까봐 언급은 하지 않음)’라는 설정을 몰래 (제 가슴 속에) 추가했습니다.” — 본인, 시즌3 캠페인 후기

팀원들이 기억하는 “홍차를 끓여주는 페스타”가 여기서 나왔다. 설정과 플레이가 어긋날 때 택하는 방향도 일관된다. “설정 따윈 장식(또는 MBTI)”이라고 2화 후기에 적어 두고, 갇히는 대신 빠져나갈 핑계를 미리 만들어 둔다. 마스터가 같은 시점에 내린 평이 정확히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완벽하게 설정을 배신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셔서 그것도 꽤 즐거웠고요. 역시 캐릭터는 플레이를 통해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 마스터, 시즌3 2화 후기

폭탄마가 특수능력 의술을 찍어 팀의 의료를 맡게 된 어긋남도 8화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어색하다고 인정한 뒤, 큰 사건을 겪었으니 성격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변화로 흡수한다. 최종화에서 친형 타오스와의 대면이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 결말로 끝나는 것도 같은 계산이다. 마스터는 이것을 “캐릭터에 걸맞는 안티 클라이맥스”라 부르며, 작위적으로라도 속 시원한 결말을 지으려 하게 되는 것이 티알인데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적는다.

후기의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다

분량으로만 보면 에이포의 후기는 자기 활약보다 동료 논평이 압도적으로 많다. 2화 후기 한 편에서 종알이·시스터.S·플라이·클루를 차례로 다루고, 캠페인 후기에서는 시스터.S와 페스타를 나란히 놓아 두 캐릭터의 작동 원리가 어떻게 반대인지를 분석한다. 흑막 세레시를 읽어 낸 최종화 후기는 비평에 가깝고, 살아남은 NPC 클루를 두고는 “어떤 NPC들은 소품이라는 존재가치를 넘어”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쓴다. 형식도 매번 바꿨다. 같은 사람이 쓴 16편이 서로 닮지 않았다.

회차 후기의 형태
시즌3 1.5-7화 특수능력 손익 계산과 조합 설계 노트
시즌3 7화 시점 캠페인 사건을 제국력 날짜로 재구성한 이벤트 타임라인 문서
시즌3 8화 스크린샷 조판 + 「8화의 NPC상」 시상식
시즌3 9-10화 가면론을 끌어온 롤플레잉 논고, 인물별 목적 / 약점 / 갈등 표

본인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제 후기들은 보면 양식이 다 제멋대로네요”라고 시즌4 0화 후기에 적으면서 괄호로 “잘난 척”을 붙인다. 톤은 이렇게 자조와 과장이 섞여 있는데 감사만은 정확해서, 시즌4 첫 MVP 수상 소감이 그 성향을 한 문장에 담는다.

“사실 제가 튀어보였다면 그건 분위기를 만들고 이끄는 역할을 해주신 분들 덕분이겠지요.” — 본인, 시즌4 1화 후기

두 시즌, 정반대의 두 캐릭터

시즌 PC 플레이북 성격
시즌3 황혼의 전달자 페스타 (코로스 피로스) 거머리 과묵한 폭탄 살인마, 40대 목수로 위장
시즌4 언체인드 재봉틀 (사이린 그린들호퍼) 야매의사 29세 무면허 의사, 위조 면허장과 자신만만한 태도
치즈도둑 플라이와 조수 페스타 — 시즌3 3화
치즈도둑 플라이와 조수 페스타 — 시즌3 3화

같은 사람이 만든 두 PC가 이만큼 다르다. 시즌4의 야매의사 자리는 오랑시도 지망했다가 물러난 자리였고, 직스는 재봉틀이 데이지와 다른 결의 츳코미를 구사해 재미있는 균형이 생겼다고 적는다. 팀원들이 기억하는 재봉틀은 과묵한 폭탄마와 전혀 다른 결이다.

“앞에 벌어졌던 수선한 분위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차분하고 고급스럽게 말하는 재봉틀은… 이 봉틀선생은, 뭐든 면허 없이 해도 다 잘 어울리겠다, 싶었습니다” — 날다다, 시즌4 1화 후기

시즌3의 페스타에 대해서는 팀 안에서의 기능을 짚은 비유가 남아 있다. 마스터가 지휘자, 종알이가 소프라노, 시스터.S가 피아노 반주, 플라이가 타악기라면 “페스타는 여기에서 ‘베이스’ 같은 존재였어요”라고 날다다가 시즌3 캠페인 후기에 쓴다. 같은 글에서 애를 먹고 있구나가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과묵하고 말 수 없는 캐릭터를 안정감있게 잘 RP하시지?”라는 감탄이었다며 과묵한 캐릭터를 유지한 것을 기술로 평가하기도 한다. 오랑시는 다른 축을 짚어, 공방까지 만들어 독자적인 무기를 완성한 것을 두고 “훌륭한 거머리예요! 거머리라면 캠페인 내 자신의 업적 하나 남기는 게 맞죠”라고 쓴다. 시즌4는 2세션 만에 멈췄고 에이포의 후기도 1화가 마지막이다. 시즌1·2와 시즌5, 이후의 Relight·ErrorHeart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초보가 남긴 것

마스터는 페스타를 “제 마스터링 인생 최고의 도전”이라 불렀다. 행동의 원칙이 불분명하고 약점이 없어 다루기 어려웠다는 것인데, 같은 문단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AAAA 님이 금방 팀과 룰에 적응해가면서 맞춰주신 것도 있고, 페스타 캐릭터 내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조금씩 변화하면서 캐릭터에 뎁스가 생기고 (…) 지금은 제법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하고요.” — 마스터, 시즌3 캠페인 후기

정진정명한 초보로 시작해 룰과 협상하고, 자기 캐릭터를 해부하고, 마스터의 최고 난도 과제가 된 두 시즌이었다. 본인이 남긴 마지막 인사는 그 모든 분석보다 짧다.

“제가 즐거웠던 것만큼 여러분도 저와 함께 즐거우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본인, 시즌3 캠페인 후기

그리고 세 시즌이 지난 뒤, 팀은 그를 이렇게 배웅했다.

“시즌5까지 함께하진 못했지만 페스타라는 유일무이한 귀여운 싸이코패스 폭탄마를 보여주셨던 에이포님” — 날다다, 시즌5 캠페인 후기

분석 대상은 에이포 본인이 쓴 어둠칼 후기 16편과 마스터·날다다·오랑시·직스가 그를 언급한 대목들이다. 시즌3 4화 MVP 사유 인용은 작성자 기록과 회고가 엇갈려 문서에 남은 작성자 기준으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