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불 속의 군단에서 보급관은 군단의 살림을 쥐는 자리다. 이번 회차에 무엇을 보급할지, 모병을
할지 사기를 올릴지, 다음 목적지에서 무엇을 준비해 둘지를 정한다. 전투 한 판의 승패보다 그
다음 세 회차가 굴러갈지에 관심이 있는 자리이고, 치킨무의 후기가 다른 사람 후기와 다르게 생긴
이유도 여기 있다. 그의 글은 거의 매번 같은 정형구로 닫힌다. “압박, 보급, 사기, 시간, 첩보,
작전, 군단의 이야기.. 뭐하나 빠짐없이…”로 시작하는 캠페인 절이다. 세션 감상이 아니라 다음
회차를 위한 브리핑이다.
| 항목 | 내용 |
|---|---|
| 군단 직책 | 보급관 |
| 스타팅 특수병 | 산호빛 거둔 들판 (중전사, “들판 할머니”) |
| 번갈아 맡은 특수병 | 붉은 발티야 (의무병) |
| 오래 굴린 신병 | 멜로디, 알리 프레야비치 |
| 그 밖 | 최종화에서 호박색 밀려오는 바람·바니·에이리크 등 임무별 PC 다수 |
직책은 진행에도 들어가 있었다. 마스터 노트의 8화 진행 순서에는 “브리핑은 사령관보 혹은 보급관이 합니다. (치킨무님 선택)”이라고 적혀 있다. 세션을 여는 권한이 그의 선택지로 놓여 있었다.
걱정 네 가지를 적고 시작했다
합류는 오랑시의 초대였다. 그때까지의 TRPG 경력은 CoC와 inSANe 계열뿐이었고, 잿불은 처음이었다. 0화 후기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TRPG라고는 CoC, inSANe의 변형룰만 주구장창 해왔던 지난 나날들… 그래서 ‘잿불 속의 군단’의 참여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땐 혹여나 ‘내가 너무 미숙하게 굴지는 않을까’라는 걱정 탓에 제법 망설였던 것 같아요.” — 본인, Relight 0화 후기
캐릭터도 이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늘 탱커를 맡아 왔던 사람이 “70대 할머니”라는 키워드 하나를 잡았고, 나머지 빈틈은 남에게 맡겼다. 세부 설정이 헐거웠던 들판이 “플레이어분들의 관심과 질문 덕분에” 완전한 캐릭터가 됐다고 같은 후기에 적는다. 날다다는 1화 후기에서 이 “쿨한 아이디어 채택 방식”을 티알피지에 꼭 필요한 자세로 꼽으며, 스스럼없이 물어보고 받아들여 더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본받을 점이라고 썼다.
살림을 맡은 사람의 시선

보급 계획이 그의 후기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계획은 늘 지난 회차에 실제로 일어난 사고를 근거로 세워진다. 5화에서는 부대가 완편되지 않아 세션이 조기 종료될 뻔했던 일을 들어 모병을 최우선에 놓는다. 6화에서는 룰 텍스트와 세션에서 본 장면을 묶어 새 품목을 만든다.
“발티야가 정신지배에 당해 트레버를 공격했던 것 + 룰북에 나와있던 파열자의 수법을 보고 정신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어떨까 싶었어요. (…) 다음 행선지인 동쪽 호반에서는 공성병기를 보급하고자 합니다. 슬슬 하늘화살 성채를 부술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서요.” — 본인, Relight 6화 후기
공성병기는 하늘화살 성채 공략을 역산해서 나온 항목이다. 그러나 한 회차 뒤 그 계획은 접힌다. 7화에서 신병이 여럿 죽고 부임무가 실패해 사기가 떨어지자, 공성병기를 미루고 사기 회복을 “가장 급선무”로 다시 잡는다. 같은 세션을 다른 사람들은 자기 PC가 무엇을 했는지로 기억하고, 그는 그 회차가 군단의 잔고에 무엇을 남겼는지로 기억한다. 이 차이가 이 인물의 시선이다. 마스터도 대규모 전투를 매끄럽게 굴릴 방법을 정리하면서 “세션 중에 치킨무 님이 제안한 적 있는 적 전체와 아군 전체의 집단행동 판정 같은 것도 방법일 것이고요”라고 적는다. 룰을 쓰는 쪽에서 룰을 손보는 쪽으로 한 발 나가 있었다는 근거다.
숫자만 다루면 브리핑은 표가 된다. 그는 대신 보급관 자리에 NPC 하나를 세워 두고 그 인격으로 보고했다. 카를 슈나우저 경이다. ‘자칭 자비로운 보급관’이라는 별명이 여기서 나온다.
“맨날 투덜투덜 거려도 해줄 건 다 해주는 보급관님이랍니다. (…) 공성병기를 구해왔을 때 슈나우저 경의 콧대는 5m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 본인, Relight 6화 후기
자원 배분표를 읽는 일이 캐릭터의 대사가 되면서, 팀에게 보급 절차는 매 회차 기다려지는 코너가 됐다.
한 줄 설정에서 캐릭터를 세운다
그가 신병을 고르는 기준은 뚜렷하다. 설정 한 줄이 걸리면 그것만 가지고 인물을 세운다. 멜로디가 대표 사례다.
“남은 별독사대 신병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멜로디의 설정 중 ‘종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아, 얘다.’ 싶었어요. (…) 멜로디를 오르 지역의 신들 중 ‘창조신’의 이단을 따르는 광신도 캐릭터로 탈바꿈 시킨 후 제가 하고 싶었던 것 전부를 한 것 같아요.” — 본인, Relight 3화 후기
마스터는 같은 회차 후기에서 이 일을 자기 쪽에서 확인해 준다. 멜로디는 원래 NPC 신병으로 굴리려던 캐릭터라 설정에 딱 한 줄만 적어 두었는데, 치킨무가 그 한 줄을 적극적으로 살려 세션에 재현해 주어 즐거웠다고 적는다.
취향은 스스로 밝혀 두되, 선도 스스로 긋는다. 7화 후기에 붙은 문단이 그 태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 TRPG를 할 땐 컨셉에 잡아먹힌 광인 친구들을 굴리는 게 재밌더라고요. 물론! 광적인 면모를 어필하느라 세션 분위기를 망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겠죠. 재미와 불편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긴 하나… 혹여 불편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 Relight 7화 후기
캐릭터의 진폭은 팀의 화제였다.
“치킨무님 거들먹거리고 잘난척하는 중년 남성 알피를 왜 이렇게 찰지게 잘하시는 거지요…? 이 분 진짜 롤플레잉 천재일지도 몰라…… 어떻게 들판 할머니부터 이런 중년 남성까지 잘 하시는 거야… 알피 폭 무슨 일이에요…” — 날다다, Relight 3화 후기
들판 할머니가 진 것, 그리고 여관 2층

들판 서사의 무게중심은 4화에 있다. 타락자 나시엘 앞에서 부대를 살리기 위해, 그는 사도 슈레야가 향한 곳을 말한다. 6화에서 그 결과를 듣고 나서도 이 사건을 다이스가 만든 사고로 정리하지 않는다. 인물이 직책 때문에 한 선택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이 기억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는 슈레야의 위치를 알려줬을 겁니다. 산호빛 거둔 들판 개인이 아닌, 군단을 이끄는 지휘관이니까요.” — 본인, Relight 6화 후기
다른 플레이어가 캐릭터 메이킹 때 걸어 둔 관계도 끝까지 회수한다. 직스가 먼저 제안했던 들판과 은빛 사붓한 바람의 유사가족 설정이 그렇다. 7화 후기에서 그는 지키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할머니에게 고아원 출신인 바람이 위로를 건네고 그 바람을 꼬옥 안아 줄 수 있어 행복했다고, 캐릭터 메이킹 당시부터 이 관계가 어떻게 풀릴지 궁금했다고 적는다.
팀과 마스터가 함께 꼽는 장면도 같은 회차에 있다. 6화 서쪽 호반의 여관 2층 전투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들판이 필사적 판정을 연달아 던지는데, 그 방침은 즉흥이 아니라 지난 세션의 룰 설명을 듣고 정해 둔 것이었다.
“지난 세션에서 필사적 판정의 필요성에 대해 마스터님께서 말씀해주셨죠. 그래서 들판 할머니 rp를 하게 된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필사적 판정을 잔뜩 해버리겠다고 다짐했었어요. (…) 정예병을 상대로 빠꾸없이 보호, 저항, 접전했습니다.” — 본인, Relight 6화 후기
마스터 쪽 기록에는 설계가 무너지는 광경으로 남아 있다. 1페이즈와 2페이즈로 나눠 두었던 조우가 1페이즈에서 끝나 버렸고, “들판의 신들린 다이스가 밸런스를 부숴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캠페인 후기에서 같은 장면을 들판의 대표 씬으로 다시 뽑을 때는 다이스가 아니라 태도를 근거로 든다.
“근접 전투에서 중전사다운 든든함과 치킨무님 특유의 거침없음을 함께 볼 수 있어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했는데도 조금도 겁먹지 않고 오히려 날 때려보라고 외치는 들판의 모습이 평소의 인자함과 대비되어 캐릭터를 완성해주었던 것 같고, 그런 RP를 하시는 치킨무님도 무척 멋졌습니다.” — 마스터, Relight 캠페인 후기
후기의 절반은 남 이야기다
그의 후기 구성은 늘 같다. 전반적인 이야기 → 자기 PC → 다른 사람들의 PC를 한 명씩 → 캠페인 브리핑. 분량으로 보면 세 번째 절이 가장 길고, 남의 장면을 짚을 때도 자기 쪽으로 가져온다. 3화 후기에서 직스의 플레이를 두고 “한 수 배워갑니다”라고 적는 식이다.
결석과 지각도 자기 손으로 적어 둔다. 8화에 늦게 도착하고 일찍 떠난 일을 9화 후기에 공개하며, “그렇다고 이 캠페인에 관심이 떨어졌다거나, 지쳐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살림을 맡은 사람다운 정리 방식이다.
같은 9화 후기에서 그는 멜로디를 나이와 소속감의 문제로 읽어 마무리한다. 광신도로 세웠던 캐릭터가 종교집단에 기대던 불안을 군단의 전우애로 옮겨 놓는 것으로 닫힌다.
캠페인이 끝난 뒤 팀은 그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주저 없음, 다른 하나는 캐릭터 서사에 대한 진심이다.
“언제나 전체적인 무님의 플레이 느낌은 무언가를 주저하지 않고 일단 도전하고 본다, 그리고 캐릭터 서사에 진심이신 만큼 거기에서 우려나오는 알피가 진짜 진국이다. 이렇게 느꼈던 거 같습니다… 무님의 강한 도전 정신으로 캐릭터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만들고, 또 그 장면에서 다함께 즐기고 감탄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꽤나 많은 거 같아요.” — 날다다, Relight 캠페인 후기
같은 캠페인을 함께한 쟈키퐁은 다른 축을 든다. 강렬한 캐릭터를 굴리면서도 남의 캐릭터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관찰이고, 그 온도를 아이들 쪽에서 읽는다.
“거기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세션에서든 전달되는게 좋았습니다. 이 세계는 아무래도 어리고 마음이 다친 고아들이 많을 수 밖에 없고, 군단병들도 할머니 앞에서는 가족과 떨어져있는 온전치 못한 아이일 뿐이라는 생각에 많이 울었습니다” — 쟈키퐁, Relight 캠페인 후기
맺음
그의 캠페인 후기는 짧고 담백하다. 0화 후기에서 걱정 네 가지를 열거하며 시작했던 사람이, 마지막에 그 목록을 다시 꺼내 하나씩 지운다.
“1) 낯을 제법 가리는 지라 처음 뵙는 분들이 절반인 탁에서 잘 어울릴 수 있을까, 2) TRPG는 CoC와 inSANe만 잔뜩 해오던 저라 (…) 3) 장기탁을 견뎌낼 수 있을까, 4) 캐입의 부담감 등등 오만가지 걱정을 했었답니다. 지금은 그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좋은 분들을 만나 정말 즐거운 세션들을 즐겼던 기억밖에 없네요.” — 본인, Relight 캠페인 후기
“제가 경험한 장기탁 중 최고의 세션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토요일 저녁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 지 모르겠어요.” — 본인, Relight 캠페인 후기
살림을 맡은 사람의 후기가 그렇게 닫히는 것은 꽤 어울린다. 군단의 물자와 사기를 매 회차 계산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계산은 토요일 저녁의 빈자리였다.
근거는 Relight 후기 66편과 마스터 노트다. Relight 후기 DB에는 작성자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아, 본인의 말로 인용한 것은 본문에 이름을 밝힌 후기와 자기 PC를 1인칭으로 다룬 후기로 한정했다. 어둠칼 시즌 쪽 후기 224편에는 이 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