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망나니즈

Data Exfiltration 시즌1(세션 1-8, 2020년 1월-2월)을 마스터 세션노트와 에피소드 후기를 근거로 소설형으로 재구성한 리캡. GM 삐룩. 무뢰한들(망나니즈): 불곰(마리 터틀러), 바퀴벌레(알도 세보이), 네눈박이(힉스 베일), 겨우살이(마라 안카야트).

프롤로그

이름 없는 넷이 저벅저벅 가로지르는 크로우스풋의 겨울 골목
이름 없는 넷이 저벅저벅 가로지르는 크로우스풋의 겨울 골목

도스크볼 북쪽, 크로우스풋의 골목에서는 이름이 값이다. 이름이 없는 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847년 겨울, 그 골목의 명부 어디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칼잡이 하나, 좀도둑 하나, 수리공 하나 —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요리사 하나.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은 거창한 야망이 아니라 각자의 빚과 원한, 그리고 어느 장례식날 밤의 수상한 의뢰 하나였다.

이것은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무명의 넷이 ‘망나니즈’라는 괴상한 간판을 얻기까지의 이야기이고, 죽은 두목의 이름을 붙들고 놓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이름에 갇혀 있던 소녀가 제 손으로 제 이름을 지어 붙이기까지의 이야기다. 크로우스풋을 나눠 가진 세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넷은 저벅저벅 제 몫의 밤을 걸어갔다.

0화 “파일럿”

세션 1 · 2020-01-02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루를 버티는 아직 이름 없는 넷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루를 버티는 아직 이름 없는 넷

847년의 도스크볼은 아직 이 네 개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마리 터틀러도, 알도 세보이도, 모스 클리거도, 힉스 베일도, 도시의 뒷골목 명부 어디에도 오르지 못한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빚을 지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속이거나 베며 하루를 벌어들이고 있었을 뿐, 아직 서로의 얼굴조차 몰랐다.

마리 터틀러는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겉보기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그 이상은 아무도 몰랐고 본인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명 꼴로 사람을 눕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그녀에게 그것은 죄도 자랑도 아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신이 정하는 일이고, 자신과 부딪혀 죽은 자는 그저 신의 뜻을 대신 집행한 것뿐이었다. 어릴 적 몸담았던 교단은 이제 그녀의 여동생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교주와는 이미 척을 진 사이였지만 신앙만은 버리지 못해, 아무도 모르게 예배당을 다시 찾아가 기도를 올리곤 했다. 여동생을 되찾을 몸값을 벌기 위해 칼을 받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의사인 톱날이빨만이 가끔 된장찌개를 끓여주며 여동생의 안부를 물어주는 유일한 이모였다. 예전에 사귀었던 체일이라는 사내는 뒤통수를 친 대가로 이제 마리의 원수 명단 맨 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알도 세보이는 서른 몇 해를 살고도 마흔이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 단검제도에 가족을 두고 왔지만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다. 그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 자신의 안위뿐이었다. 한때 노동조합 동료들과 연대보증을 엮어 큰돈을 만들었다가 도망친 뒤로 갚아나가는 빚이 있었는데, 그 빚을 갚는 이유마저도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살아남기 위한 계산이었다. 도둑질을 하다 걸린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물건을 훔치려던 귀족 로슬린 켈리스의 눈에 들어 그녀의 은밀한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비밀 하나가 그를 쫓기는 처지로 만들었다. 감령관 페트라의 정체를 함께 목격했던 친구는 이미 살해당했고, 이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도 하나뿐이었다. 목소리와 몸짓이 큰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몸이 굳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시절의 버릇이었다.

모스 클리거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대신 전우가 있었지만 아끼던 이들은 대개 전쟁 속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것은 쓰레기 같은 놈들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스코블란과의 통일전쟁이 845년에 끝났고, 지금은 847년, 그가 군복을 벗은 지 겨우 1년째였다. 저격수로 참전해 전공도 세웠지만 승전의 몫은 정치질에 능한 자들이 다 나눠 가졌다. 명예고 뭐고 다 포기한 채, 어차피 다 썩은 세상이니 이제 자신의 몫을 자신이 챙기며 살기로 했다. 다만 어린아이나 죄 없는 사람에게는 손대지 않는다는 선 하나만은 지켰다. 함께 군복을 벗은 전우 카스타라는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 있었고, 부대에 남아 소령까지 진급한 셀렌이라는 이름은 모스가 등지고 나온 모든 것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보다 자신이 길들인 짐승 하나를 더 믿었다.

힉스 베일은 스코블란 출신 난민치고는 일찍 국경을 넘은 축이었다. 생김새도 스코블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신분을 숨기기에 유리했다. 기계를 만지는 재주 하나 믿고 바다 건너 대학에 밀항해 들어갔지만, 학자금은 감당이 안 됐다. 그의 출신을 알아챈 범죄 조직이 접근해왔다. 재능을 빌려주면 가짜 신분과 돈을 주겠다는 말에 손을 잡았지만, 학위도 신분도 받지 못한 채 그 조직은 별것 아닌 사건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소탕되었다는 기사로 끝을 맺었다. 밀항 시절부터 알고 지낸 약사 스타지아만이 가끔 술을 나눠 마셔주는 사이로 남았고, 차별을 설교하던 사제 말리스타에게 한 번 골탕을 먹인 일로 원한도 하나 얻었다. 이제는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만들어 팔며 술값을 버는 게 전부였지만, 마음속에는 늘 화가 가득했다. 다 터져버리라지, 그는 종종 그렇게 되뇌었다.

넷 중 누구도 아직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마리 터틀러는 칼을, 알도 세보이는 손버릇을, 모스 클리거는 조준을, 힉스 베일은 화를 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도스크볼은 이런 무명의 이름들을 수도 없이 삼켰다 뱉어내는 도시였고, 그중 몇이 어느 날 갑자기 한자리에 불려나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1화 “아무리 허술해도 저택은 저택이야”

세션 2 · 2020-01-12

잠에서 깨어 단검부터 더듬는 그레이스
잠에서 깨어 단검부터 더듬는 그레이스

크로우스풋은 초상집 같았다. 어제까지 구역을 틀어쥐고 있던 까마귀파의 수장 로릭 그랜트가 죽었고, 오늘은 그 장례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다들 새 우두머리 리사를 의심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조문 행렬을 따라 저택을 비운 병력이 많아, 지금이 아니면 다시없을 틈이었다.

그 틈을 노리라고 부추긴 것은 낯선 사내였다. 스스로를 두통이라 밝힌 그는 뒷골목치고도 유난히 딱딱한 얼굴로 넷을 훑어보며 말했다. “난 두통이고, 날 귀찮게 하면 머리에 통증을 딱 한 번 느끼게 될 거야.” 이어 붙인 말은 더 노골적이었다. “너희들 같은 초짜들 데리고 일하기가 쉽다고 생각해?” 그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로릭의 저택에서 돈과 함께, 그가 “귀중한 물건”이라 부른 무언가를 챙겨 나오는 것. 붙잡히면 램프검댕의 의뢰였다고 둘러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구하러 올 거야.”

창고에서 몸을 풀며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불곰은 예전에 사람을 통째로 집어던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도 그 이야기가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곧 넷은 북쪽 창고를 벗어나 저택 북동쪽 채광정원으로 스며들었고, 유리 지붕 너머로 몸을 숙이자마자 경비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란을 가라앉힌 뒤에는 북쪽 주방을 통해 2층으로 기어올랐다.

3층으로 오르는 길은 중앙계단 아니면 건물 외벽뿐이었다. 외벽을 타면 바깥 경비의 시선을 살 것이고, 계단을 오르면 그 앞을 지키는 눈을 마주해야 했다. 중앙계단 한복판, 오래된 동상 앞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넷은 몸을 굳혔지만 그뿐이었다. 저택은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로릭의 침실에는 소문대로 비밀 금고가 있었다. 비밀번호식 자물쇠에 짧은 수수께끼가 적힌 메모가 곁들여져 있었고, 통째로 들고 나가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 위층 작은 침실에서는 로릭의 딸 그레이스가 잠들어 있었다. 비밀번호를 아는 건 저택 안에 그녀 하나뿐이었다. 잠을 깨우자 그레이스는 눈을 뜨자마자 허리춤의 단검부터 찾았다. 짧고 날카로운 대치 끝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번호를 넣고 금고를 열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낯선 자객 하나가 같은 생각으로 먼저 저택에 들어와 목걸이를 챙겨 달아나고 있었다. “두통? 처음 보는 녀석인데?” 자객은 그 이름조차 몰랐다. 동쪽 홀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뒷모습을 붙잡을 새도 없이, 넷은 예기치 못한 몸싸움에 휘말리며 저택 동쪽 2층 지붕으로, 다시 1층 지붕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바닥에 내려선 순간에야 뒤쫓는 발소리가 끊겼다는 걸 알았다.

돈은 손에 넣었지만 목걸이는 놓쳤다. 그래도 그 밤의 성과는 담장 밖에서도 이야기가 될 만큼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우호적인 손을 내민 조직의 그늘 아래서, 넷은 비로소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간판도 걸리지 않은, 갓 태어난 무리였다.

1.5화 “매출의 30%”

세션 3 · 2020-01-14

구치소 철창 안에서도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마라
구치소 철창 안에서도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마라

로릭이 죽고 리사가 까마귀파의 새 우두머리로 올라선 뒤로도, 크로우스풋의 골목들은 여전히 세 세력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돌아가고 있었다. 그 북쪽 구역 어딘가, 낮에는 문 닫힌 간판 뒤에 숨은 좁은 뒷방 하나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는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온갖 산해진미를 다루던 요리사가 있었다. 서른 중반을 넘긴 여자였다. 부모는 둘 다 그녀가 스물여덟 무렵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병을 붙들어 두려 쏟아부은 돈은 집안의 재산을 거의 바닥냈다. 살집이 붙은 몸에 자잘한 흉터가 잔뜩 남은 것은, 그 뒤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고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었다.

식당의 건물주는 오거스라는 건축가였다. 제 손으로 설계한 건물에 도취되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하나로 임대료를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밀어 올리던 자였다. 매출의 삼 할을 떼어가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부모의 병수발로 이미 곳간이 빈 요리사에게 그 몫까지 떼어줄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가게 문에는 자물쇠가 걸렸고, 평생 재료와 불 앞에서만 살아온 여자는 거리로 나앉았다.

그래도 남은 사람은 있었다. 식당의 단골로 드나들다 어느새 벗이 된 정보상인 살리아였다. 장사를 접은 뒤에도 살리아는 종종 그녀를 집으로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했고,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면 그 자리에서 넌지시 말을 얹었다. 건강한 육체는 맛있는 음식에서 나온다, 먹기 위해 산다 — 그것이 이제 그녀가 붙들고 있는 유일한 믿음이었다. 재산도 가게도 잃었지만,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감각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여자에게 도스크볼은 한눈팔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번에 떨어진 것은 마약을 팔았다는 누명이었다. 여자는 구치소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고, 철창 안에서도 버릇처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남을지부터 헤아렸다. 크로우스풋 북쪽에 갓 뿌리내린 어느 무리가 그 이름을 주워들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2화 “이렇게 힘들 일이냐”

세션 4 · 2020-01-17

불타는 창고를 등지고 동료들을 끌어안은 채 물가로 나뒹구는 불곰
불타는 창고를 등지고 동료들을 끌어안은 채 물가로 나뒹구는 불곰

구치소 문이 열렸을 때, 마라 안카야트는 마중 나올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마약을 팔았다는 누명을 쓰고 한 달을 갇혀 지낸 여자였다. 그런데 정문 앞에는 낯선 얼굴들이 서 있었다. 크로우스풋 북쪽 구역에 뿌리내린 지 얼마 안 된 무리, 망나니즈였다. 한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식당을 꾸리던 여자는 그날부로 겨우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의 나무에 뿌리내리고도 끝내 살아남는 식물의 이름이었다. 무엇을 잃었든 먹어야 살고, 살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운 여자에게, 그 이름은 낯설지 않게 들어맞았다.

낯선 얼굴들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붉은띠단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남기고 간 것은 쪽지 한 장이었다. “붉은띠 검술 학교에서 잠깐 얘기하고 싶은게 있어 -마일레라 클레브.” 청유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검술 학교 안쪽, 좁은 사무실로 안내받아 앉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이 그 앞을 지켜 섰다. 마일레라 클레브는 잘 웃지 않는 여자였다. 우아했고, 예술품을 아꼈고, 그 우아함 밑에 날카로운 것을 숨기고 있었다. “리사의 저택에서 불이 켜지는 석상을 봤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원래 내 것이다. 리사의 하수인들이 훔쳐갔지.” 그리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희가 우리 조직원 한 명을 죽였다고 하더군.”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멋대로 쳐들어가서 멋대로 죽은 녀석에게 동정의 여지는 없지.” 그녀는 그렇게 정리하며 오히려 그들을 지목했다. “얼굴이 팔리지 않은 너희들이 제격이지.” 붉은띠단은 까마귀파를 정면으로 치기보다 먼저 재정을 파탄내고 싶어했다. 아직 전면전을 벌일 때는 아니었다. 주요 인물들이 다른 일에 매여 있었으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만큼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의뢰는 간단했다. 까마귀파가 새로 입수한 고급 마약을 훔치거나, 그럴 수 없다면 태워버릴 것. 자리를 뜨려는 참에 그녀의 시선이 불곰에게 머물렀다. “어이, 그거 이루비아 검이냐?”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마디를 더 얹었다. “체일이 전하라더군. 도스크볼의 어둠은 자기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기엔 너무 깊다고.”

일이 벌어진 곳은 운하 근처의 창고였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짐의 절반 이상이 배로 옮겨진 뒤였다. 쌓아둔 상자들 사이로는 옅은 유령장이 감돌았다. 디머 자매와 얽힌 자리라는 소문이 있었고, 들어간 자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 따라붙는 곳이었다. 불곰은 그 앞에 서서 무언가를 살피다 말없이 굳어버렸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끝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짐을 태우려는 순간 경비 하나가 겨우살이의 팔을 낚아채고 총을 뽑아 들었다. 존이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겨우살이는 그 손을 뿌리치고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그사이 바퀴벌레는 이미 물살에 밀려나기 시작한 배 위로 몇 번이고 뛰어올랐다 미끄러지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발목이 꺾였다. 무모해 보이는 그 몸짓이 오히려 경비들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마지막 순간 불곰이 두 팔을 뻗어 동료들의 허리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그대로 물가로 함께 나뒹굴었다. 등 뒤에서 창고 한쪽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는 이미 상당수가 운하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지만, 남은 상자들은 불길에 휩싸여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망나니즈는 그날 밤, 붉은띠단과 램프검댕 양쪽 모두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겨우살이에게는, 그것이 이 무리에서 치른 첫 대가였다.

3화 “우린 규모는 작지만 거대한 이상을 가진 큰 조직이라구”

세션 5 · 2020-01-26

달리는 마차에 몸을 던져 올라타는 바퀴벌레
달리는 마차에 몸을 던져 올라타는 바퀴벌레

일주일 만에 다시 문을 연 여관은 아직 2층 손질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손님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그 사이 뒷골목에는 뒤숭숭한 소문 몇 가지가 함께 돌았다. 마일레라 클레브가 감령관 하나를 손수 처리했다는 이야기, 로릭의 장례식에 정작 시체가 없었고 감령관들이 태워버린 흔적조차 없었다는 께름칙한 이야기, 그리고 램프검댕의 바즈소 바즈가 로릭의 딸 그레이스를 데려갔다는 이야기까지. 정작 리사조차 그 마지막 소문을 믿는 눈치라는 말이 흘러들어왔다.

여관 위층에 숨겨둔 그레이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답답함을 터뜨렸다. 이 방에서 지낸 지 벌써 2주째, 자신이 인질인지 동료인지 손님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변장을 하면 밖에 어느 정도 다녀도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을 돕고 싶어요.” 저택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힌 건 자유가 없다는 사실보다도,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쪽이었다고 했다. 리사가 왜 자신을 찾지 않는지도 스스로 답을 냈다. “리사는 저를 찾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제가 사라져줘서 기쁘겠죠.” 그리고 오래 삼켜온 소문 하나를 마침내 입 밖에 냈다. 아버지를 죽인 게 리사라는 소문이었다. 확인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레이스가 부탁한 일은 까마귀파 내부, 로릭에게 충성하던 무리를 구해내는 것이었다. 버려진 교회에 고립된 이들의 우두머리는 키에란, 로릭을 형님으로 모셔온 유령사였다. 그는 로릭의 시체조차 본 적 없는데 리사가 하루아침에 두목 자리를 꿰차고 사람들의 충성까지 얻어낸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로릭은 좋은 사람이었소. 까마귀파의 영토를 일부 포기해가면서까지 평화를 주도한 사람이었지.” 네눈박이는 아예 까마귀파의 얼굴을 하고 교회 안까지 태연히 걸어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낯선 얼굴을 등에 업고 조직 안으로 스며드는 그 뻔뻔함이 오히려 길을 열었고, 농성하던 이들은 그렇게 탈출로를 얻었다. 키에란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홀로 남은 바퀴벌레가 추격자들을 흩어놓고는 달리는 마차를 향해 몸을 던져 그대로 올라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탈출이었다. 약속한 작은 ‘선물’까지 챙긴 키에란은, 무릎을 꿇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스 아가씨에게 충성하겠소.”

그 대가는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리사가 보낸 자객 넷이 아직 정비도 끝나지 않은 여관으로 숨어들었다. 전면전이라기엔 너무 적은 수였지만, 노리는 목만은 분명했다. 갓 합류한 키에란이 손등을 코와 입에 가져다 대고 기합과 함께 손을 앞으로 뻗자, 보이지 않는 힘이 자객들을 한꺼번에 밀쳐 넘어뜨렸다. 습격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 무렵 불곰은 애꿎은 청과상 리처드의 가게를 뒤엎어 놓았다. 오이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실랑이 끝에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리처드는 다름 아닌 벌집에 물건을 대는 공급책이었다. 사소한 소동이 도스크볼 뒷세계의 거대한 이름 하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었다.

그날 밤, 그레이스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리사가 로릭을 위해 손에 넣으려 했던 조율의 목걸이도, 그것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리사는 태어날 때부터 유령과 어떤 방식으로도 이어질 수 없는 사람, 유령면역자였다. 그 사실 하나가, 지금까지 쌓여온 소문들 위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램프검댕에서 부름이 온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두통이라는 이름을 대며 찾아온 이들에게 정작 램프검댕 안에서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술을 마시던 2인자 피켓만이 그 이름을 알아듣고 낯빛을 굳혔다. “그 얘길 어디서 들었지?” 안내받은 사무실에서 삼십 분을 기다리자, 한 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위스키 병을 든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병을 네눈박이 쪽으로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는 책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내가 바즈소 바즈, 두통이다.” 언제고 곁을 맴돌던 위스키 애호가가 실은 램프검댕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이 그 순간 뒤집혔다. 계산이 남았다며 그는 금전 넉 냥을 내밀었다. 원래 몫에, 오지 못한 도베르만의 몫까지 더한 값이었다. 규모는 작아도 거대한 이상을 가졌다는 이 조직은, 어느새 크로우스풋의 세 세력 모두와 얼굴을 트고 있었다.

4화 “저 애는 지금 누구한테 복수해야 하는지조차 모르잖아”

세션 6 · 2020-02-02

연막 속에서 리사를 들쳐업고 빠져나오는 불곰
연막 속에서 리사를 들쳐업고 빠져나오는 불곰

소굴에서의 하루하루는 겉으로는 평온했다. 불곰은 붉은띠 검술학교를 드나들며 이루비아 검법을 갈고닦았고, 겨우살이는 까마귀파 도박장의 마스터와 친분을 트는 일에 공을 들였다. 네눈박이와 바퀴벌레는 소굴 안에서 체력을 단련하며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키에란은 자신과 그레이스의 은인인 망나니즈를 돕겠다고 다시 한번 말했고,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바라던 외출을 마침내 얻어냈다. 돌아온 그레이스는 부끄러운 얼굴로, 이제 조직에 도움이 되고 싶으니 자신을 ‘단검’이라 불러달라고 말했다.

며칠 뒤 램프검댕의 바즈소 바즈가 망나니즈를 불러들였다. 용건은 두 가지였다. 저택 잠입의 보수를 포함해 서로 밀린 것을 청산하자는 것이 첫째였고, 그레이스를 넘겨받지는 않되 램프검댕이 데리고 있는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 둘째였다. “너희가 눈감아준다면 대신 너희들과 그레이스의 신변은 약속하지.” 왜 그런 소문이 필요한지 미심쩍게 여긴 일행은 바즈소를 구슬려 속사정을 캐냈다. 까마귀파가 그레이스를 넘겨받는 대가로 도박장 절반의 이권과 현금을 내놓기로 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램프검댕이 그레이스를 데리고 있다는 소문이 먼저 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눈박이는 거래의 진정성을 세우려면 그레이스의 위장 신분이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바즈소 바즈는 피켓에게 이야기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파했다.

소굴로 돌아온 일행은 남은 이들에게 거래 내용을 전했다. 키에란은 바즈소 바즈가 이런 계획을 짤 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 아니라며, 이 모든 것이 피켓의 그림일 거라 짚었다.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리사가 하는 모든 말은 거짓말이에요. 리사가 하는 어떤 말도 믿지 마세요.” 그리고 덧붙였다. “리사를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아주세요. 아빠의 죽음에 대해 들어야 하니까요.” 그레이스가 방으로 들어간 뒤, 키에란은 오래 묵혀온 의문을 꺼냈다. 유령면역자인 리사가 대체 왜 조율의 목걸이를 그토록 원했을까. 조직에 키에란을 빼면 쓸 만한 유령사도 없는데. 일행은 귀뚜라미 튀김을 씹으며 키에란의 추측을 들었다. 리사가 로릭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레이스를 원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불곰은 키에란에게 예전에 부두에서 목격한 유령장을 함께 조사하자고 청했지만, 키에란은 그레이스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겨우살이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려봐도 소용없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 키에란을 붙들고 있었다. 고집을 꺾지 못한 불곰은 화를 삭이지 못한 채 정보를 캐러 간 ‘새는 양동이’ 주점에서 손에 잡히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어 패고 던져버렸다. 그 소란 속에서 까마귀파의 전 두목이었던 마딘걸이 오래 품어온 의문을 흘렸다. 로릭의 장례식에는 시체가 없었다고. 신분을 증명하지 못해 감령관들이 가져가 태워버리는 일은 흔했지만, 이번엔 시체도 유령도, 감령관이 태운 흔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겨우살이는 스트라스밀 고아원을 찾아 까마귀파에 관한 소문을 모았다. 요새가 아주 삼엄하다는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 무렵 네눈박이는 키에란에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 유령장 조사에 함께 가는 대신 그레이스도 데려가자는 것이었다. 키에란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유령장의 메아리 속으로 들어간 일행은 로릭이 죽던 날의 진실을 마침내 목격했다. 그 자리에서 감령관을 살해한 것은 리사였고, 마일레라 클레브는 그 누명을 대신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감령관이 애초에 그곳을 찾은 이유는, 로릭의 죽음이 아니라 리사가 저지른 또 다른 살인 때문이었다.

한편 바퀴벌레는 부두의 노동자 친구들을 통해 바즈소 바즈에 대한 뒷조사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램프검댕의 피켓이 폭탄을 구하려 여기저기 손을 뻗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소문을 접했다. 조각난 정보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가운데, 망나니즈는 램프검댕과 까마귀파의 거래 현장에 몸을 숨기고 판을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 그레이스 대신 홀로 나타난 바즈소 바즈는 리사와 실랑이를 벌이다, 까마귀파 요새 쪽에서 터진 굉음에 놀라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리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총을 쏘았고, 총알은 그의 어깨를 스쳤다.

네눈박이가 거리에 연막탄을 터뜨리자 까마귀파 전체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불곰은 그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리사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최면가루를 들이마시게 했다. 그러나 리사는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총을 뽑아 들었다. 총구는 불곰을 향했지만 불곰은 몸을 틀어 총알을 피해내고는, 그 기세로 리사를 들쳐업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리사는 마침내 망나니즈의 손에 붙잡혔지만, 그녀가 정말로 로릭을 죽인 것인지, 그레이스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남아 있었다.

5화 “과연 아직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세션 7 · 2020-02-09

무너지는 까마귀파 요새에서 담배를 문 바즈소 바즈
무너지는 까마귀파 요새에서 담배를 문 바즈소 바즈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리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손발이 묶인 채로도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중했다. “굉장한 분들이군요. 도대체 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그레이스를 납치하고, 구역에서 영업을 하고, 마약을 태우고, 이번엔 자신까지 붙잡아 놓고서도 원망 한마디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여러분이 아무리 막는다 해도 의식은 성공했습니다. 이제.. 대량의 죽음만이 필요할 뿐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치 선물을 건네듯 웃음기 없는 말투로 속삭였다. “그 분에게.. 크로우스풋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되묻지 못했다.

소굴로 돌아온 무뢰한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폐허였다. 문은 부서져 있었고 안쪽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넷이 쓰러져 있었다. 키에란은 중태였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 몸으로 그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오,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소.” 그리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건 함정..이오.” 리그니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그레이스를 보러 돌아온 자리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까마귀파의 습격이었다.

머릿수부터가 승산이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혀 이길 수 있는 인력이 아니었다. 그 한복판에서 리사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까마귀파는.. 로릭의 유산입니다. 크로우스풋..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 물었다. “당신들을 영영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사실의 통보였다. 소굴이 노출된 이상 더 버틸 자리가 아니었다. 무뢰한들은 붙잡았던 리사를 다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총알이 뒤따라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안은 채로, 일행은 가까스로 그 밤을 넘겼다.

같은 시각, 겨우살이는 홀로 바즈소 바즈의 뒤를 밟아 까마귀파의 요새 안까지 따라 들어가 있었다.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바즈소 바즈는 넋이 나간 얼굴로 실없이 웃더니 담배를 꺼내 연기를 위로 뿜어 올렸다. 요새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던 피켓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부축했다. 그 순간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겨우살이는 몸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지친 몸으로 새 거처를 구하는 사이, 조직은 한 단계 자라 있었다. 리그니의 여관을 그대로 아지트로 쓸 수 없게 된 자리에, 마침내 제대로 된 숙소가 하나 생겼다. 뒷골목에는 새로운 소문 두 가지가 나돌았다. 부관 벨이 사실은 유령사이며,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단검이 실은 유령의 권능이라 거리와 상관없이 총알처럼 날아와 꽂힌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일레라 클레브가 총알조차 베어낼 수 있고, 몇 명을 조용히 ‘실종’시키고 증거 몇 가지를 ‘분실’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이야기였다.

램프검댕은 이미 사실상 무너진 뒤였다. 남은 곳은 마일레라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리사의 저택에 붙잡혀 있었고, 로릭을 뱀파이어로 만들려던 의식이 끝내 성공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온전히 실감으로 다가왔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여전히 살아있다고 부를 수 있는가. 아무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물음이었다. 그 무렵 키에란은 몸을 추스르고 정식으로 무리에 합류했다. 로릭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못한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마일레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한 밤, 무뢰한들은 리사의 저택을 습격할 채비를 갖췄다. 정문의 경계는 만만치 않았고, 남은 전력 대부분이 그곳에 몰려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계획은 세워졌지만, 저택의 문턱을 넘어서기도 전에 그 밤은 저물었다. 그레이스의 운명도, 리사의 최후도, 아직은 그 문 너머에 남아 있었다.

최종화 “이제 나는 ‘단검’이니까”

세션 8 · 2020-02-16

난간 위에서 몸을 던지며 '단검'을 선언하는 그레이스
난간 위에서 몸을 던지며 '단검'을 선언하는 그레이스

그레이스를 빼앗기고 소굴마저 무너진 밤이 지나자,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망나니즈는 붉은띠단의 검술 교관 마일레라 클레브를 찾아갔다. 램프검댕은 이미 무너졌고 도움을 청할 곳은 그녀뿐이었다. 바즈소 바즈의 행방을 쫓아 나섰던 걸음은 끝내 빈손으로 돌아왔고, 검술학교에서는 하마터면 다른 싸움에 휘말려 큰 화를 입을 뻔했다. 그래도 마일레라는 움직였다. “정면의 중앙계단으로 올라간다면 1층에서 3층으로 단숨에 올라갈 수 있지. 내가 뒷문을 통해 습격하고 적당히 타격을 입히고 빠진다. 너희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정문을 통해 단숨에 올라가면 되겠지.” 리사의 저택은 이제 까마귀파의 마지막 요새였다.

북쪽에서 마일레라의 총성이 울리자 저택을 지키던 인원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그 틈에 서쪽 창고를 통해 스며든 망나니즈 앞을 에드워시와 조무래기들이 막아섰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지트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리사를 넘기라 협박했던 장본인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겨우살이가 거미줄처럼 질척한 말로 그를 몰아붙여 정신을 뒤흔들었고, 그 틈에 불곰의 칼이 그의 팔을 갈랐다. 1층은 그렇게 뚫렸다.

2층은 사람은 적었지만 발코니에서 저격 총구가 아래를 겨누고 있었다. 체일이 그 총구를 몸으로 막아서는 사이, 불곰과 네눈박이, 바퀴벌레와 겨우살이가 둘씩 짝을 지어 저격수들에게 붙었다. 네눈박이의 가루가 하나를 집어삼켰고, 나머지 하나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총성 한 번 제대로 울리지 못한 2층이었다.

3층, 마지막 계단 위에서 리사가 그레이스의 목덜미를 잡고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채 서 있었다. 난간 높이는 1미터, 손을 놓으면 그대로 떨어질 거리였다. 곁에는 단검을 품은 벨과, 총을 겨눈 엘리트 까마귀 둘이 있었다. “거기서 멈추고 계단 위쪽으로 물러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아이의 목숨은 없습니다.” 리사가 말했다. 그러고는 그레이스를 향해, “조금만 있으면,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데요.” 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리사, 아빠는 죽었어요. 당신이 죽였죠.” “그게 무슨…” 리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레이스는 한 팔로 리사의 손목을 붙든 채 고개를 돌려 뒤쪽을 힐끔 보았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도, 아빠에게도 붙잡혀 있지 않을 거야.” 그레이스가 말했다. “이제 나는 무력한 인질이나 바보같은 그레이스가 아니라, ‘단검’이니까.” 품에서 꺼낸 작은 단검이 리사의 손목을 그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리사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스는 난간 위에서 몸을 뒤로 던졌다. 동료들을 믿고 뛰어내리는 몸짓이었다. 아래에서 그녀를 받아낸 것은 망나니즈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인질이 아니라, 스스로 붙인 이름 그대로 ‘단검’이 되어 조직의 일원으로 섰다.

연회장 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져 날아간 것은 그 직후였다. 검은 형체가 뛰쳐나와 까마귀 하나의 머리를 붙잡아 남쪽으로 내던졌다. “아빠....?”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로릭…?” 리사가 뒤따라 중얼거렸다. 로릭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벨이 단검을 날렸고, 검은 손이 다른 조직원 하나의 목덜미를 붙들어 동쪽으로 내던졌다. 리사는 그 자리에 선 채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 순간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마일레라가 몸을 굴려 착지했다. 날아드는 총알을 검으로 튕겨내며 그녀가 말했다. “늦었군.” 체일이 뒤따라 뛰어들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새끼곰~ 보고싶었어?” 체일과 마일레라가 로릭에게, 마일레라가 다시 리사에게, 벨이 체일에게 붙으며 3층은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려는 순간, 겨우살이가 저택을 로릭째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말로 리사 앞을 막아섰다. 진짜인지 허세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리사는 손을 거두었다.

그레이스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온 망나니즈는 저택을 벗어났지만, 추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도 벨은 마차를 몰고 뒤쫓아왔다. 고용했던 마부 콜만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마차에는 불이 옮겨붙었다. 그레이스까지 가세한 채로 달리는 마차 위에서 벌어진 마지막 싸움 끝에, 망나니즈는 마침내 리그니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까마귀파는 무너졌다. 크로우스풋을 두고 다투던 세 세력의 균형도 그와 함께 뒤바뀌었다.

에필로그

다시 불 켜진 여관에 둘러앉은 망나니즈 식구들
다시 불 켜진 여관에 둘러앉은 망나니즈 식구들

까마귀파는 무너졌고, 크로우스풋의 밤은 주인이 바뀌었다. 붉은띠단은 이제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름이 되었고, 한때 바닥까지 몰락했던 램프검댕은 피켓의 손에서 조용히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정작 그 판을 흔들어 놓은 장본인, 바즈소 바즈는 어디에도 없었다. 위스키 병을 든 사내가 언제 어느 골목에서 다시 나타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사가 뱀파이어가 된 로릭을 끝내 길들였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 너머에서 되찾으려던 여자와, 사람이기를 그만둔 채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만 그 사랑의 인질이었던 소녀만은 어둠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레이스는 이제 아버지의 딸도, 리사의 인질도 아닌 망나니즈의 ‘단검’이었다.

그리고 여관의 불은 다시 켜졌다. 요리는 겨우살이가 하고, 고장난 것은 네눈박이가 고치고, 무거운 것은 불곰이 들고, 위험한 것은 바퀴벌레가 먼저 뛰어들었다. 키에란은 그 곁에서 그레이스를 지켰다. 이름 없이 시작한 무리는 이렇게 크로우스풋에 간판 하나를 걸어두는 데 성공했다. 도스크볼의 어둠은 자기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기엔 너무 깊다지만, 적어도 이 밤 그들의 목은 무사했다.